깊어가는 가을에
이택희
무더운 여름을 지나면 아침저녁 기온차가 심해지고 잠을 청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끈적거리던 습기가 가시어 피부에 와 닿는 공기도 신선하다. 귀뚜라미 울음과 풀벌레 소리가 더 크게 들리면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푸른 하늘이 더 파래지고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은 더욱 선명하다. 누렇게 익어 추수할 손길을 기다리는 황금 들녘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조차 풍요롭게 한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은은한 국화향이 온 누리에 퍼지는 가을, 여름동안 향기롭게 피어 눈길을 끌던 꽃들이 사라져 가고 갈대가 더욱 선묘하게 부각되기 시작하는 계절, 억새에서 올라온 부드러운 수술이 애잔해 보인다. 샛노란 은행잎이 땅에 떨어져 흩날리기 시작하면 가을은 이미 깊어있다.
앙상한 가지에 붉은 감이 또렷이 드러나면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감나무에서 감이 사라지고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 몇 알 남을 무렵이면 가을도 저만큼 멀어져 있다.
가을은 수확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교차하는 계절이다. 미래를 대비하는 계절인 반면 떠남을 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빨갛게 익어 추수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과는 탐스러움을 더해가고 푸른빛 대추가 누렇게 익어 털어줄 사람을 기다린다. 들판에서 곡식단을 거둬들이는 농부의 손길엔 활기가 넘친다.
가을은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음을 알려주는 교사이다. 여름동안 무성하던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간도 언젠간 떠나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다. 잎이 무성하며 열매가 열리는 때가 영원하지 않고 곧 추운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계절이다.
가을은 커피 맛이 좋아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거리엔 낙엽이 뒹굴고 기러기 떼가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할 때이면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든다. 이럴때 마시는 따끈한 커피는 사는 기쁨을 더한다.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마시는 쓰디쓴 커피. 커피 한 잔에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음은 가을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가을은 고독을 즐기는 사람에게 적당한 계절이다. 왠지 쓸쓸한 마음을 주체할 길없어 서성이게 되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베란다나 뒤뜰에 나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가을은 누구나 한번쯤 철학자가 되게 하고 사상가가 되게 한다. 책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마저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책 한 권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던가.
가을을 인생에 비유하면 황혼기에 해당될 터이다. 뜨거운 태양과 푸른 잎으로 가득한 여름날이 청년기라면 억새가 피어나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 지는 가을은 성숙함으로 대변되는 장년기 혹은 노년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가을에 듣는 음악은 선명하다. 쓸쓸한 가을날 공연장을 찾아 음악을 들으며 전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세상사는 참 맛의 하나를 잃고 사는 사람일지 모른다. 마음바닥에 가라앉은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켜 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면 좋을 일이다.
노년기에 접어든 성숙한 인격체가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불우한 이웃을 돕는 토론토 장로합창단의 창단 14주년기념 자선찬양의 밤이 오는 주말 열린다. 이날 연주를 통해 얻어진 수익금은 맹인후원회 개안수술을 위한 기금으로 쓰여진다고 한다.
겉모습만 보아도 머리가 숙여지는데 한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더욱 감동적이리라. 사라져가는 세월이 아쉬워 붙잡고만 싶은 계절에 음악을 통하여 감동을 받고 어르신의 삶을 배울 수 있다면 보람될 터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내미는 정성어린 손길과 땀흘리는 수고에 동참할 수 있음도 행복할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깊어가는 가을에 심금을 울리는 합창음악을 들으며 잔잔한 감동에 빠져들면 어떨까.
* 토론토 장로성가단이 주최하는 맹인 후원회 개안수술 기금모금을 위한 창단 14 주년 자선찬양의 밤은 10월 25일(토) 오후 7시 30분 갈보리 한인장로교회에서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