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불혹의 추석(천상병)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8. 10. 6. 03:16

<불혹의 추석/천상병>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시집 ’(조광출판사, 1971)

 

 1930년생인 시인이 불혹에 즈음한 1969년에 쓴 시이다. 이 시가 수록된 는 살아있는 시인의 시집이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첫 사례였다. 여기에는 물론 기막힌 곡절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문단 데뷔 당시 일화가 흥미롭다. 서울상대를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1954년 어느 날, 그는 학장으로부터 상과대학 석차 5위 안의 학생은 한국은행에 공짜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이 5번 안의 성적임을 암시받은 것이다. 그러나 천상병은 1952년에 이미 추천 완료되었고 당시 문예지에도 시를 발표하고 있었으므로 안정된 직장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때부터 다른 것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시인으로 살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훗날에도 시인 이상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결심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후회는 없다고 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도 이유의 하나겠으나 일찌감치 이런 특별한 결단과 그이 시, 삶의 방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천진무구한 순수시인, 기인으로 기억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 천승세는 일찍이 기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기인은 유별난 꿈과 정열의 소유자이고,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 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 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들은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다. 매우 진실하게 평범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이다.”

 천상병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그에게 당시 시대분위기상 왁자지껄했을 추석이라 해서 특별한 날은 아니었겠으나 쓸쓸하긴 했나보다. 그러나 그것이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임을 스스로 잘 안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에서의 제사는 따분한 인습이나 전통에 속박되지 않고, 형식의 예복을 벗어던지고, 인간을 정해진 틀에 끼워 넣으려는 획일적 사회구조에 등을 돌린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제의였으리라. 소설가 김훈은 그의 기행을 이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열어버리는 놀라운 개방성이라고 표현했다. 상대를 나온 그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과 조소로 일관한 삶을 산 것도 일반의 눈으로 보면 아이러니하다.

 그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라 할 수 있다. 가난도 행복의 일부분이라 여기면서 가난을 즐겼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자유와 무욕의 삶은 이윽고 추석날 노자의 말씀을 되새기기에 이른다. “知者不言 言者不知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는 시종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지만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며 자조한다. ‘口是禍門입은 화의 근원임을 깨닫는다. 조용하면서 은근히 다른 존재들과 동화하는 玄同의 삶을 살아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는 물질의 가난뿐 아니라 말의 가난을 삶의 전략으로 채택하기로 마음먹는다.

 천상병 시인이 불혹에 다짐하며 찾아 나선 길을 나는 지금에야 어렴풋이 느낀다. ‘道法自然도는 저절로 그러함을 無爲自然부드러운 것이 단단함을 이기고 애써 함이 없는 것이 결과적으로 유익한 대도임을. ‘上善若水가장 이상적인 삶의 태도는 물과 같음을.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는 것을. 가장 뛰어난 기교는 서툴게 보이며, 뛰어난 웅변은 눌변처럼 들리는것을. 노자는 말했다. “그대가 정말로 어떤 바람도 없도, 어떤 명예나 성공, 야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귀결로써 성취한다.” ‘그대의 빈 마음 안으로 전 존재가 쏟아지면서 그대 자신으로 행복하다라고. (권순진 씀)

 

출처: 시 하늘 통신/ 글쓴이: 4

 

 나는 시인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잠시 상사(1990~1993)로 계셨던 전건호 상무께서 시인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시인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공부하셨으나 한참 후배였고 또 문인이 아니어서 작품세계나 시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시인이 늘 문디 가시나하고 불렀다는 아내 분이 운영하셨던 인사동 찻집 귀천에 들러 차를 마시며 이미 고인이 되신 부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께서는 수줍은 모습으로 조용조용 말씀하셨는데 시인에 대해 원망 섞인 이야기도 진솔하게 들려주셨다. 시인께서 당신을 늘문디 가시나라고 부르셨단다. 시인의 아내답게 달관한 모습도 보였다. 목 여사는 내가 캐나다로 이주한 후인 2010 8월 26일 세상을 떠나셨다.

 

 천상병 시인의 시 '행복귀천'을 가져다 둔다.

 

<행복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 걱정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예쁜 아내니

여자 생각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귀천/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과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과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1993 4 28일 작고하였다. 

 

<2018 10 5일 아버님 7주기 기일에 閑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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