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본 시니어 대학 가을학기 글쓰기 강좌 2
<이번 학기 과제>
1) 사랑하는 사람(배우자, 자녀, 친구 등)에게 편지 쓰기
2)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각 나이대마다 떠오르는 한 장면(이미지)을 떠 올리며 수필 쓰기
3) 내가 세상을 떠난 후 장례식(funeral)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거나, 남기고 싶은 이야기 글로 써보기
<수필 읽기>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閑素
문제투성이 세상입니다. 보험금을 타려고 가족을 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가 난다고 학교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폭탄 테러로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지진과 해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기꾼들이 활개를 치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빠들의 허리가 휘어집니다. 세상이 점점 나아져야 하는데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게 어떤 건지 혼란스럽습니다. 돈 십억이 주어진다면 감옥에 가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꿈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대학을 나와봐야 직장을 잡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공부하면 뭐하냐고 반문하며 자조(自嘲)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정치인들은 공약(公約) 아닌 공약(空約)을 남발하여 국민을 실망하게 하고 빈부의 격차는 커져만 갑니다. 중년의 가장은 자녀 교육과 혼사 등 쓰임새가 많은데 직장에서 강제로 나와야 하니 걱정입니다.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대로 중년은 중년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사는 게 녹록하지 않다고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가히 절망의 시대라 할 만합니다.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발이 날리지만, 땅속엔 이미 봄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죽은 듯 보이는 가지이지만 때가 되면 싹이 돋고 잎이 납니다.
어린 동생 둘과 함께 동그마니 세상에 남겨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1960년대 초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업이라고는 없을 때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우주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지요.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굶어 죽었다는 소문도 간간이 들려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여 사회에 밝은 빛을 비추고 일가(一家)를 이룬 분이 계십니다. 강영우 박사님이 그분입니다.
간밤에 어깨가 시리고 온몸이 욱신거렸습니다. 진통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일어나니 몸이 개운치 않고 가위눌린 듯했습니다. 마침 아내가 사다 놓은 커피가 있어 함께 나누며 서재에 앉았습니다. 친구가 빌려준. 강영우 박사님의 유작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를 집어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아내에게 남긴 편지 한 구절이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실의에 빠져있을 때 해준 한마디 말이 그렇게 고마웠다고, 표현을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꼭 말하고 싶다고. 강 박사께서 처한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한다면 그래도 지금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요? 그토록 어려운 시절을 살아냈으면서도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자녀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M 대학의 헬스 사이언스(Health Science) 학과에 입학해 공부하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Q 대학 헬스 사이언스 학과로부터 큰 금액의 장학금을 제시 받은 자녀도 있습니다. 이모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들어가 수술을 끝내고 회복 중인 자녀도 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는 의지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이 계시기에 세상은 조금씩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1964년 당시 젊은 강영우와 같은 청년들이 여럿입니다. 절망의 시대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가고 있습니다. 먼 훗날 그들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뿐인 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아니, 제 눈에는 희망만 보였습니다.”
강영우 박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아내와 자녀에게 남긴 편지를 올려놓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의 유고집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는 좋은 친구 신홍기 전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나의 지팡이가 되어준 당신, “사랑합니다.”/강영우>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당신에게 내민 이름 석 자. ‘석.은.옥’싸구려 반지 하나 끼어 주지 못한 프러포즈, 그리고 반지 대신 내민 그 이름 석 자를 너무 감사하게 받아주던 당신, 그런 당신과 부부의 인연으로 함께한 지도 벌써 40주년입니다.
앞으로 함께할 날이 엄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입니다. 시각 장애인과의 결혼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 준 당신이 고맙고, 이렇게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와 항상 같은 곳을 보면서 함께해 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나의 지팡이가 되어 나보다 항상 한 발짝 앞서 걸어주던 당신, 그런 당신에게 가장 고마웠을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진영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습니다. 한국 시각장애인 최초로 박사가 되어 금의환향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학생 비자는 만료가 되고,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도 중단되어 버리고, 어린 아이들은 둘이나 되고, 이런 현실 속에 주저앉아 버리려는 나를 당신이 위로했습니다.
세 살짜리 진석이의 손을 잡고, 갓난아기인 진영이를 품에 안고, 식료품점이라도 열어서 생계를 유지할 테니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열심히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라고 나를 격려해 주던 당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안도하셨는데, 절대로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거라고, 반드시 더 좋은 문을 열어 주실 거라고 당신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때 당신의 모습을, 신념에 가득 찬 당신의 목소리를, 나를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마음속으로만 하던 말을 이제야 글로 남깁니다.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습니까?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이들 키우고, 일을 하고, 가사를 돌보고, 바깥 일에 바쁜 나를 위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쓰던 당신. 매일 예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먹먹해집니다. 편안하게 앉아 식사하던 날보다 운전하며 끼니를 때우던 때가 더 많았던 당신. 당신은 나를 위해, 우리 가장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하기만 합니다.
마음보다 머리로 먼저 생각하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따뜻하게 품고 살아가는 당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집안의 따뜻한 심장으로 우리 모두를 감싸 안아준 당신의 사랑 속에서 나와 우리 두 아들이 지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나에게 가정을 선물해 준 당신,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 준 당신, 그리고 나를 늘 믿어 준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난 5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나를 늘 자신을 이끄는 등대라 불러주던 당신, 그런 당신은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었습니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당신을 난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살게 한 내 아들들, “축복합니다”/강영우>
이제 너희들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훌륭하게 자라준 나의 아들들을 난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안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오는구나.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한 추억이 내 마음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
진석아, 아버지는 고사리 손을 있는 힘껏 모으고 아버지의 눈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던 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꼭 안과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눈을 고쳐 주겠다고, 그 작은 가슴을 있는 힘껏 부풀리며 큰소리로 약속하던 너의 모습을 말이다. 항상 고집스럽게 네가 원하던 것을 위해 나아가던 모습이 난 자랑스러웠고,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하던 널 보며 난 뿌듯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고 늘 스스로에게 당당한 진정한 남자 진석이. 그런 네가 너를 믿지 못할 때도 난 항상 너를 믿었다. 그리고 지금도 믿고 있다.
진영아,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품고 사는 나의 작은아들. 항상 자신보다 남들을 먼저 생각하는 너의 모습이 걱정스러울 때도 있었단다. 그렇지만 당돌하게 세상에 맞서 네 방식대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너의 도전 정신이 난 정말 자랑스럽다. 나의 연설문을 네가 처음 교정해 주던 날을 기억하니? 내가 쓴 연설문을 손에 들고, 네가 연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너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니.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항상 좋은 파트너였다. 수십, 수백, 수천 명 앞에 홀로 서서 연설할 때도 내가 떨지 않았던 것은 나의 글 속에, 나의 말 속에 항상 네가 함께했기 때문이란다.
진석아, 진영아, 나의 말에 항상 귀 기울여 준 너희들이 난 고맙구나. “시도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해보기 전에는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너희들이 이제는 최고의 안과의사로, 최고의 법조인으로 더 좋은 세상과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이 아버지는 뿌듯함을 넘어선 감동을 느낀단다.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준 너희들. 아들과 함께 목욕하고, 뒹굴며 뛰노는 즐거움을 선물해 준 너희들. 손주들과의 오붓한 낮잠을 즐길 기회를 준 너희들을 주신 하나님께 난 정말 감사한다. 너희들 덕분에 난 복된 삶을 살았구나.
특히나 이번 크리스마스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선물이었단다. 눈먼 고아로 어린 동생 둘과 세상에 남겨졌던 나에게 지금과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나는 아마도 거짓말을 해도 좀 그럴듯하게 하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한 집에서 이민 1세대인 나와 내 동생들이, 그리고 2세대인 너희 둘과 나의 조카들이 각자의 배우자들과 함께 북적이고, 또 이민 3세대인 너희의 아이들이 뛰어놀며 온 집안을 웃음소리로 가득 채웠던 이번 크리스마스를 난 잊지 못할 것이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저절로 힘이 난다는 것이 이런 것임을 나는 그날 느꼈다. 내가 떠나더라도 진석이, 진영이 너희들이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단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이 늘 너희들과 함께하기를 하늘나라에서도 아버지는 믿고 계속 기도할 거란다. 나의 아들 진석이와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고, 축복한다.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장영희>
얼마 전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를 했다. 최근 몇 년간 나에 대한 기사는 거의 암 환자 장영희, 투병하는 장영희에 국한되어 있어서 그냥 인간 장영희, 문학 선생 장영희에 맞춰 줄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열심히 문학의 중요성, 신세대 대학생들의 경향 등등을 성의껏 말했다. 그런데 오늘 우송되어 온 잡지를 보니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天刑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였다.
'천형 같은 삶?' 그 기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 심히 불쾌했다. 어떻게 감히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 맞다. 나는 1급 신체장애인이고, 암 투병을 한다. 그렇지만 이제껏 한 번도 내 삶이 천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사람들은 신체장애를 갖고 살아간다는 건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듯이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그런대로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솔직히 난 늘 내 옆을 지키는 목발을 유심히 보거나 남들이 '장애인 교수' 운운할 때에야 '아 참, 내가 장애인이었지.' 하고 새삼 깨닫는다.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서울 명혜학교 복도에는 윤석중 씨가 쓴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있다.
사람 눈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사람 귀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산 너머 못 보기는 마찬가지
강 너머 못 듣기는 마찬가지
마음눈 밝으면 마음 귀 밝으면
어둠은 사라지고 새 세상 열리네
달리자 마음속 자유의 길
오르자 마음속 평화 동산
남대신 아픔을 견디는 괴로움
남대신 눈물을 흘리는 외로움
우리가덜어 주자 그 괴로움
우리가 달래 주자 그 외로움
영어 속담에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Count your blessings)."라는 말이 있다. 누구의 삶에든 셀 수 없이 많은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말이다. '천형'이라고 불리는 내 삶에도 축복은 있다.
첫째, 나는 인간이다. 개나 소, 말, 바퀴벌레, 엉겅퀴, 지렁이가 아니라 나는 인간이다. 지난주에 여섯 살짜리 조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는데 돈을 받고 아이들을 말에 태워 주는 곳이 있었다. 예닐곱 마리 말이 어린아이 하나씩을 등에 태우고 줄지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말들은 각기 목에 '평야', '질주', '번개', '무지개', '바람' 등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는 이름표를 달고 직경 5미터나 될까 말까 한 좁은 공간을 하루 종일 터벅터벅 돌고 있었다. 아, 그 초점 없고 슬픈 눈. 난 그때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축복에 새삼 감격하고 감사했다.
둘째, 내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들만 있다. 좋은 부모님과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태어난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주변은 늘 마음 따뜻한 사람들, 재미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들을 만난 것을 난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내게는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다. 가치관의 차이겠지만, 난 대통령, 장관, 재벌 총수보다 선생이 훨씬 보람 있고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한국에서 손꼽히는 좋은 대학에서 똑똑한 우리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천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넷째,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와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몸은 멀쩡하다손 쳐도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듣는 안하무인에, 남을 아프게 해 놓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적어도 기본적 지력과 양심을 타고났으니, 그것도 이 시대에 천운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 멋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얼마 전 다시 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aound of Music)>에서 대령과 사랑에 빠진 마리아가 <그 무언가 좋은 일(Something Good)>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난 심술꾸러기였고, 내 청소년기는 힘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 당신이 거기에 서 있으니, 내가 과거에 그 무언가 좋은 일을 했음에 틀림없어요."
마리아의 논리로 따지면, 나도 이렇게 많은 축복을 누리고 살고 있으니 전생에 난 '그 무언가 좋은 일'만 많이 한 천사였음에 틀림없다. 아 참, 내가 누리는 축복 중에 아주 중요한 걸 하나 빠뜨렸다. 책은 아무나 내는 줄 아나? 이렇게 내 글을 읽어 주는 독자가 있어 책을 낼 수 있고 간간이 날 알아보는 독자가 "선생님 책을 읽고 힘을 얻었어요."라고 말해 주는 것은 내가 꿈도 못 꾸었던 기막힌 축복이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내 삶은 '천형'은커녕 '천혜天惠'의 삶이다.
<음악과 인생/박용구>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하여 체험한 이야기를 어떤 젊은이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그는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 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시간표도 정원도 없는 이 화물차는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그는, 서울을 떠날 때, 포오터블(portable) 축음기와 애청하는 레코오드 몇 장만을 옷과 함께 륙색(rucksack)에 꾸려 넣고 이 피난 열차에 올랐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던 차가 덜커덩하고 또 섰다.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허허벌판에서 몇 시간을 또 지체할는지 모른다. 이때, 그 젊은이는 축음기와 레코오드를 꺼냈다. 그는 축음기에 레코오드를 얹고 바늘을 올려놓았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 작곡인 ‘지(G) 선상의 아리아’ 였다. 고아하고도 명상적인 바이올린의 멜로디는 눈 온 뒤의 정결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니, 맑은 공간이 고스란히 공명(共鳴)함이 된 듯, 축음기의 가냘픈 소리가 한결 또렷하게 들렸다.
모든 사람은 오늘의 괴로움을 잊고 경건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스려 가고, 하늘과 땅도 숨을 죽이고, 이 명곡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하던 화차 안이 조용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 아닌가! 지식도, 생활도, 성격도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한결같은 감동에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지이 선상의 아리아’ 가 여운을 남기고 끝났을 때, 서양 음악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한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곡을 한 번 더 들려 달라.” 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흔히 말하는, 음악을 안다든지, 음악을 모른다든지 하는 기준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를 느끼는 동시에, 시골 노인조차 감동에 몰아넣는 음악의 힘에 대하여 새삼스러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노인은 아마 젊었을 때부터 오랜 세월을, 음악은 배불리 먹은 뒤에 심심풀이로 듣는 것이 아니면, 술 마시고 흥겨울 때 필요한 여흥으로밖에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지 모른다.
화차(火車) 안에 있는 그 숱한 피난민 가운데에는, 지금껏 음악은 시끄러운 것으로밖에는 느껴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곤두섰던 사나운 마음이 한결같이 누그러지고, 차분한 명상의 비단 물결이 가슴을 씻어 주는 듯한 쾌감을 그 때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최면술에 걸린 것 같은 도취의 상태가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도 감각이 예민한 각성의 상태였으리라. 그들은 아름다운 멜로디가 불러일으켜 주는 고아(高雅)한 정감을 느끼며, ‘아, 삶이란 얼마나 엄숙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나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 왔건만, 과거에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했던고!’ 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극복할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 같이, 음악은 역경과 불안 속에서도 구원의 손길이 되며, 절망에 쓰러진 사람조차 분기시키는 힘을 지닌다. 악성(樂聖) 베에토벤이, 날로 심해 가는 귓병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결심하고 유서까지 쓰게 되었다가, 그 절망을 극복하고 일어선 것도 오로지 이 음악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은 영혼 깊숙이 깃들여 작용할 뿐 아니라, 순간적으로는 인간의 육체적인 행동까지 좌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힘을 가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전제적인 왕정에 반대하기 위하여 일어선 파리의 시민들이 ‘라 마르세예즈’ 의 노래를 부르며 총검을 향하여 돌진한 사실을 보더라도, 음악이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다.
거리를 걸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행진곡의 리듬에 발걸음이 저절로 맞추어지며, 흥겨운 무곡이 들려 올 때, 육체적인 약동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물까지도 음악에는 민감하다고 한다. 리듬은 삶의 표징인 심장의 고동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심장의 고동에서 강약(强弱)을 느끼고, 그것에서 두 박자의 리듬 감각을 길렀다.
미개인의 음악을 들어 보면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들이 두드리는 북 소리는 흡사 심장의 고동을 확대해 놓은 것 같다. 어린 아이가 기분이 좋을 때 장난감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는 것도 두 박자다. 침팬지가 흥겨워 뛸 때에는 한쪽 다리에 힘을 주어 두 박자의 트롯이 된다고 어떤 동물학자는 말했다.
낮과 밤의 바뀜이 우주의 리듬이라면, 심장의 고동을 근원하는 두 박자의 리듬은 영원불변의 음악의 기본 리듬이다. 세 박자나 이 밖의 복합 박자의 리듬은 이에서 파생 되고 변화된 것이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협동 작업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함께 사냥을 가서 큰 짐승을 잡고 그것을 나르자면, 협동 작업이 필요했다. 이럴 때에 두 박자의 엮음 소리는 협동 작업을 한결 쉽게 했다.
인간은 어느 틈엔가 두 박자의 노래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멜로디의 탄생이다. 기쁜 일이 있어 잔치가 벌어져서, 짐승 가죽을 나무통에 메운 북을 치며 춤을 출 때에도 두 박자의 리듬이 필요했다.
그러나, 짐승 소리와 새소리를 모방하여 엮음소리를 삼던 인간들 사이에 대화가 생기면서부터, 개체 보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생리적인 욕구 이외에 정감적인 교류를 바라는 심적인 욕구가 커지면서부터 음악의 구실도 달라지고, 표현력과 방법도 많이 바뀌었다.
집단의 행동 통일을 쉽게 하는 북 소리는 여전했으나, 정감적인 교류의 구름다리가 되는 관악기와 현악기들이 만들어져서, 인간은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호소를 음률로 표현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가사로 마음을 호소하는 노래의 좁은 한계를 벗어난 기악의 폭 넓은 표현력과 방법은, 말하자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요, 신(神)만이 울릴 수 있었던 영혼의 종을 인간의 힘으로 울려 줄 수 있는 승리의 길잡이다.
이 반면에, 음악의 힘을 이용하면 그만큼 위험성도 커진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에 히틀러가 수많은 젊은이를 사지로 몰아넣는 데에는 음악의 힘을 악용했고, 옛날 중국의 장자방은 초패왕의 십만 대군을 옥퉁소 한 자루로 흩어지게 했다는 고사도 있다. 즉, 항우의 대군을 포위한 장자방은 달 밝은 가을 밤, 옥퉁소로 구슬픈 가락을 불어 고향을 떠나 전야(戰野)에서 스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항우의 군사로 하여금 고향을 생각하게 하여 군영을 탈주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음악은 인간을 광기로 몰아넣을 수도 있고, 인간의 건전한 힘을 뺄 수도 있다.
오늘 날, 일부 그릇된 음악이 시정에 범람하는데, 이런 음악은 인간의 건전한 정서와 덕성을 좀먹고 있다. 이와 같은 음악은 표현력이 커질수록 더욱 인간 생활에 깊이 침투 하여 해독을 끼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가끔 보람 있는 인생의 길을 모색하는 명상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럴 때에 그릇된 음악이 우리 심신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의미와 삶을 제시하는 건전한 음악에 귀 기울이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인생의 성공자란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 읽기-
<소꿈/송진권>
소가 나를 찾아온 밤엔
마음이 들썩여 잠을 잘 수가 없네
뿔에 칡꽃이며 참나리 원추리까지 꽃은 소가
나를 찾아온 밤엔
자귀나무처럼 이파리 오므리고
호박꽃처럼 문 닫고 잘 수가 없네
아이구 그래도 제집이라고 찾아왔구나
엄마는 부엌에서 나와 소를 어루만지고
아버지는 말없이 싸리비로 소 잔등을 쓰다듬다가
꽁깍지며 등겨 듬뿍 넣고 쇠죽을 끓이시지
소가 우리 집을 찾아온 밤에는
밤새 외양간에 불이 켜지고
마당도 대낮같이 환하게 밝혀지고
그래도 제집이라고 왔는데 하룻밤 재워 보내야 한다고 얼렁 그 집에 소 여기 왔다고 소리 하라고 기별을 보내고
웃말 점보네 집에 판 소가 제집 찾아온 밤엔
죽은 어머니 아버지까지 모시고
소가 나를 찾아온 밤엔
마음이 호랑나비 가득 얹은 산초나무같이
흔들려서 잘 수가 없네
잉어를 잡아다 넣어둔 항아리처럼
일렁거려 잘 수가 없네
<무말랭이/안도현>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어 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꾹 짜버리고
이레 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해 가을 나는 외갓집 고방에서 뀌뚜라미가 되어 글썽글썽 울었다
<한 말씀/김달교>
새 한 마리 날아와
밥 차리다 말고 시를 쓴다
햇살 밥 바람 반찬 펼쳐 놓은
둔치 밥상 위에다
콕콕
암팡지게 쓰고 또 쓴다
어느 결에 강물 한 종지 떠와서는
쓴 것 지우기를 수십 번
마음 적실 문장 하나 애타게 찾는다
쉴 새 없이 방아 찧는 부리를 바라보며
강물이 던지는 한 말씀
그만 지우란다
정말 쓰고픈 말은
행간에 숨겨두는 거라면서
통통 튀며 박수받고픈
물수제비는 흘려보내란다
두리번거리느라 핏발 선 눈부터 지우란다
그냥 흘러가란다
<모국어/김해자>
가출했다 잡혀 온 내 손모가지 꽉 붙들고
엄마는 딱 한마디 했다
집에 가자이,
아무 말 못하고 엄마 손에 끌려갔다
목포역 앞이었다
머를 좀 잘못 알았는갑소,
잘 좀 알아보소이,
우리 애기는 절대로 그럴 애가 아니랑께요,
경찰서 안이었다
머시라도 묵어야 심을 쓰지,
한 입만 떼멕이믄 안 되겠소라우,
산통 이틀째 애도 낳기 전에
미역국부터 먹은
신천리연합의원이었다
평생 단 며칠도 집을 못 비우던 엄마는
일생에 단 한번 순례하듯 마실 다녔다
일곱집 돌아가며 밥그릇 채우던
석가모니 제자들처럼
아이고 내 새끼 왔냐,
맨발로 뛰어나오던 가리봉동이었다
북숭아 살 같은 물컹한 장마 드시고
홍시 같은 늦가을도 달게 드시고
겨울이 집 앞에 봄을 부려놓자마자
되얐다,
인자 집에 갈란다,
탁발 순례 마치고
큰오빠 집으로 간 지 한달 만에 영영 가셨다
혼자서만 가는 나라
언제 갈지 모르는
어딘지 몰라 찾아갈 수도 없는
집 우(宇)
집 주(宙)
- 참고 글 -
“잡초라 부르는 것조차
모두 아름답다
세상에, 시시한 인생도
없다
어디에도”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 <잡초 인생> 중에 쓰인 글 (썩일 雜 풀草: 여러가지 풀이 섞여 자라는 식물)
“조로바는 사람을 보거나 꽃핀 나무를 보거나 시원한 물 한 잔을 보아도 똑같이 깜짝 놀라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날마다 모든 것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본다.”
조로바는 포도주를 한잔 마시더니 화들짝 놀라서 나를 돌아보았다.
“이 붉은 물은 또 뭐랍니까, 대장? 말 좀 해 줘요! 묵은 나무에서 가지가 자라고, 처음에는 가지에 쓴 열매만 달리는데,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열매를 익히면, 열매가 꿀처럼 달콤해져서 포도라는 게 되오. 그걸 밟아 뭉게고, 즙을 내서 통에 담으면, 즙은 저절로 발효하지요. 성 요한의 날(8월 15일에 열리는 클리도나스 축제. 할로윈과 비견됨) 열어 보면, 포도주가 되어 있는 거요! 기적이지요! 당신이 붉은 즙을 마시면, 이건 또 무슨 수수께끼인지, 당신 영혼이 커지는데, 영혼이 늙은 송장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커지면, 이게 하느님하고 맞장을 뜬다오. 그런데, 대장, 어째서 그런 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을 듣는 동안 세상이 원래의 신선함을 회복하는 것을 느꼈다. 무덤덤한 일상이, 우리가 신의 손에서 풀려나고 일상이 시작되던 때의 산뜻함을 되찾았다. 물과 여자들과 별들과 빵이 신비하고 본원적인 최초의 형태로 돌아가고, 갑자기 신성한 회오리바람이 다시 한 번 대기를 휘저으며 솟구쳐 올랐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로바’ 전자책 102 페이지 중에서, 아름다운날 刊, 강이경 譯
'문학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5년 본 시니어 대학 가을학기 글쓰기 강좌 4 (0) | 2025.10.01 |
|---|---|
| 2025년 본 시니어 대학 가을학기 글쓰기 강좌 3 (2) | 2025.09.26 |
| 2025 본 시니어 대학 가을학기 글쓰기 강좌 1 (0) | 2025.09.11 |
| 글을 말처럼 꺼내라 (0) | 2025.03.27 |
| 다시, 봄 (0) | 202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