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에리카 칩맨(Erica Chipman)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6. 12. 12. 00:02

      여행을 할 때마다 경험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 이번 토론토 여행은 어쩐지 좀 조용하게 다녀 왔으면 싶었다. 숫기가 없어진 탓일까? 지난 3월 10일 귀국 후 약 9개월 만에 출국이니 서먹함도 없지 않다. 또한 영어를 쓴지 거의 일년이 다되었으니 말도 많이 잊어버렸다. 말이란 쓰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게 된다. 영어는 특히 더하다. 대한항공을 타면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잊어버려도 좋으나 타 국적사의 항공기를 탈 때에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 영어를 제법 잘해야 얻어 먹는 것도 수월하게 먹을 수 있다. 이번에 선택한 항공편은 에어캐나다이니 다소 긴장이 되기도 한다.

 

      장거리 비행기를 탈 때마다 비상구 쪽 좌석에 앉기를 원하는데 오늘도 운좋게 비상구 쪽 좌석에 앉게 되었다. 비상구 쪽 좌석은 앉은 자리에서 앞 좌석과의 간격이 다소 넓어 여유가 있다. 대개 비상구 좌석은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 앉는다. 비상구 좌석의 편함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좀 다소곳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영어를 쓴지도 제법 오래 되었고 또 괜스레 잘난 척 해봐야 그게 그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 50에야 느끼는 여유로움 혹은 여유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딩(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말함)을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비행기에 올랐다. 서둘러 봐야 뭐 뾰족하게 얻을 것도 없다. 미리 타려면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또 그렇게 가봐야 앉는 곳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통로를 쭉 따라 들어가 내 자리를 찾았다. 옆 창 쪽 좌석에 20대 초반의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게 왠 떡이냐 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을 터인데 이제는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편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여행하려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방해할 수도 있다. 영어도 통 감이 오지 않는데 잘못하면 민폐를 끼쳐도 한참을 끼치게 된다. 머리 위에 짐을 올리고 다소곳이 않아 책을 펼쳤다.

 

친구 교신과 신윤이 추천한 최인호의 소설 유림을 읽기는 하는데 읽는 속도가 영 평소 같지 않다. 옆에 너무 젊고 멋있는 아가씨가 앉아서 일까? 옆에 앉은 아가씨는 예쁘기는 하나 분주한 모습이 전형적인 20대의 모습이다.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한 것도 수 차례다. 여행의 설렘 때문이리라.

 

       읽히지도 않는 책을 억지로 읽는 것 보다 잠을 자 두는 것이 낫겠다 싶어 눈을 감았다. 깜빡 잠이 드는가 했는데 스튜어디스가 음료수 서비스를 시작하는 통에 일어 났다. 몰슨 캐내디언 맥주를 달라고 하여 한잔을 마시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다. 옆에 앉은 아가씨는 레드 와인을 주문해 마신다. 나도 맥주 말고 와인이나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남의 떡이 맛있어 보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몰슨 캐네디언 맛이 순하고 맛있다. 한국에서 마시는 OB나 하이트 보다 좀 싱겁긴 하지만.

 

       좀 있으려니 저녁이 배달된다, 오늘 저녁은 소고기에 밥 혹은 국수를 곁들인 것이다. 국수에 소고기를 달라고 했다. 음식과 함께 와인 또는 다른 음료수도 서비스로 제공된다. 이번엔 레드 와인을 달라고 했다. 최근에 집 근처에 괜찮은 와인집이 생겨 가끔 다녀 와인에 대한 조예가 좀 생겼다.

 

       기내식이 수준급이고 와인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옆에 두고 아무 말 없이 음식과 와인을 먹고 마시는 건 아무래도 안꼬 빠진 찐 빵 같다. 용기를 내어 옆의 아가씨에게 물었다. 집에 가느냐고. 그렇다고 반색을 한다. 내 영어도 말이 되긴 되는 모양이다.

 

       에리카라는 이름의 친구는 나이가 20대 중반이다. 몬트리얼에서 지리학을 전공했고 핼리팩스(캐나다 동북쪽에 있는 조그만 마을, 가까이 있는 노바스코시아는 빨간머리 앤이 쓰여진 무대이기도 하다)가 고향이다. .아버지는 수출입 일을 하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 양친 모두 55년 생이다. 스무살 된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스페인에서 아이스하키 개인 코치를 한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하여 동남아의 태국과 캄보디아를 인상 깊게 여행했다는 친구는 대구의 대곡동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돈벌이도 괜찮고 또 친구도 사귀어 한국생활에 만족하는 느낌이다. 캐나다와 한국 두 나라를 너무 좋아한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한국에 대한 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고 한국 사람과 문화가 좋다고 하니 말이다. 크리스마스와 신년을 핼리팩스의 부모님 곁에서 보내고 내년 1월 말이나 2월초에 다시 한국을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동생 미정이의 영어개인교사로 추천하면 좋겠다 싶어 이메일 주소를 받아 적었다. 에리카는 한국인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한다. 스킨 스쿠버를 좋아하고 이탈리아 식당의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을 보는 눈이 전통적인 우리네 사고와는 사뭇 다르다. 그 남자 친구와 태국과 캄보디아로 함께 여행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어린 학생들을 주로 가르치는데 중년 여성도 가르친단다.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어 무척 행복하다고 말하며 하는 일에 만족해 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핼리팩스에서 여행할 만한 곳, 자랑거리를 말해 달라고 하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가 계속된다. 사람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랑스러워 하는 것을 이야기 해달라고 하면 대개는 입에 거품을 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이다. 또 지금까지 여행한 곳을 소개해 달라고 하니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대구에서 주로 다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자 삼덕소방서 근처의 선더버드(Thunderbird)를 소개한다. 집시락(Gyosy Rock, 일명 G2), Ieatwon, Frog, Bubble 등의 이름도 추천해 준다.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얻고 배우려고 들면 얻는 것이 많다.

 

         여행의 큰 기쁨 중 하나는 만남이다. 새로운 환경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난다. 이번 여행에서는 에리카를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하여 핼리팩스의 여행할 곳에 대하여 들었고 핼리팩스의 중산층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태국과 캄보디아 여행에 대하여 들었다. 타인의 경험을 통하여 얻는 정보도 많다. 특히 여행지에 관한 경험은 훗날 나의 여행에 도움을 줄 것이다.

 

         여행은 사람을 더 크게 만든다. 오늘 만난 에리카도 내 삶에 오래 기억될 만남으로 남기를 바란다.

         (2006년 12월 8일 인천에서 벤쿠버로 가는 에어캐나다 비행기 안에서, 이택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