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사과나무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7. 9. 16. 15:10
                                                                   사 과 나 무
                                                                                                                              이 택 희
  가을의 대표과일을 들라면 사과를 꼽을 것이다. 딸기와 참외, 자두 수박 복숭아를 거쳐 사과가 수확되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든다. 가을이면 과수원에 커다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다. 가지가 휘도록 탐스럽게 매달린 모습을 보면 고향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 자라던 과수원에 이른 봄이 오면 부모님은 일로 분주해졌다. 퇴비를 리어카에 실어 나르며 나무 아래 흩었다. 거름을 뿌린 후 괭이로 땅을 뒤집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과 꽃이 피었다. 새색시 볼 같던 연분홍 꽃 몽우리에서 하얀 꽃잎을 활짝 터트렸다. 온 천지가 은은한 향기로 진동했다. 어릴 적 보던 사과 꽃만큼 아름다운 꽃을 보지 못했다. 내게 털끈 만큼의 감성이라도 살아있다면 그건 사과 꽃의 아름다움과 꽃향기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과밭에 물을 댈 때면 광에 넣어 두었던 발동기를 돌려 지하수를 퍼 올렸다. 발동기가 ‘탕탕탕’ 돌아가기 시작하면 커다란 쇠파이프로 물이 ‘콸콸’ 쏟아졌다. 기다렸던 물이 쏟아져 나올 때의 그 야릇한 기쁨과 신기함이란! 물은 과수원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미쳤다. 먼 나무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따라 종이배를 만들어 띄웠다. 폭이 좁은 도랑으로 떠가는 가냘픈 배가 제대로 갈 리 없었지만 띄우고 또 띄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
  농약을 치던 날이면 약을 썩는 일은 아버님 몫이었다. 시멘트로 된 커다란 약탕에 물을 붓고 거기에 약을 탔다. 약봉지에는 뼈로 만든 엑스표 위에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혼합한 약의 색깔은 파랗고 예뻤으나 약봉지의 해골그림은 무서웠다. 약 뿌리는 날 잔칫집 같던 분위기에 신이 나 약탕 가까이로 뛰어가면 지체 없이 고함소리가 따라왔다.
  과수원 가운데 인도라는 달고 맛있는 품종의 사과가 있었다. 이른 아침 나무 아래에 가면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커다란 인도가 떨어져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나무로 달려가 맛있어 보이는 사과는 있는 대로 주웠다. 동생이 먼저 일어나는 날이면 크고 맛있는 건 다 주워갔고 작고 맛없는 것만 남아 있었다.
  늦여름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들으면 부모님은 사과 떨어질 염려에 잠을 못 이루셨다. 철없던 나는 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듣기를 좋아했고, 젖은 나뭇잎과 비릿한 땅 냄새 맡기를 즐겼다. 열어둔 뒷문으로 들려오는 ‘후두둑’ 비 떨어지는 소리가 시원했다. 태풍으로 온 땅에 사과가 나뒹굴어도 크고 맛있는 사과 주워 먹는 일이 더 신났다. 
  추수 때가 되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 사과를 땄다. 한 사람은 사과를 따고 한 사람은 위에서 던져주는 사과를 받았다. 양손으로 사과를 받는 아주머니들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광주리를 가지고 직접 나무에 올라 사과를 따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에서는 널빤지에 못을 박아 상자를 만들었다. 만든 상자는 마당가득 쌓아 두었다가 나중에 사과를 옮겨 담았다. 사과로 가득가득한 궤짝들은 서늘한 광에 넣어져 보관되었다. 광을 열면 서늘한 기운과 함께 사과의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 그 향기롭던 냄새!
  부모님은 농사지은 사과를 팔아 여동생 피아노도 사고, 침대도 샀다. 냉장고, 전축, 텔레비전도 샀다. 공산품이 귀하던 시절이라 이런 것이 집에 있으면 자랑이 되곤 했다. 사과 판돈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귀한 물건들도 샀던 것이다.
  사과는 희망의 열매이다. 스피노자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희망의 상징임을 나는 안다. 사과나무가 있어 내일이 있는 것이다. 오늘 비록 힘이 들고 어렵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으면 소망이 있다. 밝은 내일이 있다. 심지 않으면서 내일의 소망을 기대하는 건 감나무 아래 누워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에 다를 바 없다.
  사과에는 햇빛을 받아 빨갛게 잘 익은 부분이 있는가 하면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해 익지 않은 부분이 있다. 잎이나 가지에 가려 빛을 받지 못한 부분은 파란색으로 남는다. 사람의 성품도 빨갛게 잘 익은 부분이 있고 파랗게 설익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잘 익은 장점은 더욱 살리고 파란색 단점은 개선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가리라. 사과의 빨간색을 보고 잘 익었다고 판단하듯이 타인의 잘 익은 부분, 밝은 부분을 보는 습관을 가지리라. 상대의 단점을 지적하고 실망하기 보다는 장점을 닮으려 애쓰리라.
   밝고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이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어두운 소식, 비관적인 소리에 귀기우리기보다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 올해보다 나은 내년이 있을 거라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
   아침 산책길에 아저씨가 차에 사과를 한가득 싣고 와 팔고 있다. 운동을 나오신 어르신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한 조각 베어 맛을 본다. 다가가 한 쪽 받아먹어 보았다. 물이 많고 당도가 높다. 산책을 좀 일찍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차를 가지고 다시 갔다. 커다랗게 두 봉지를 담았다. 하나는 집에서 먹고 하나는 큰 동생을 주고 싶었다. 운전대를 잡고 되돌아오는 길, 마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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