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호 박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7. 9. 7. 10:38
  좀 못생긴 사람을 보면 호박같이 생겼다고 한다.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도 있다. 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유년시절 같은 반 여자아이를 박호순으로 부르기도 했다. 거꾸로 읽으면 순호박이 되니 이 역시 호박을 빗대어 놀려댄 것이다. 어쩌다 이리도 괄시 받는 신세가 되었을까. 특별히 예쁘거나 화려하여 단번에 눈길을 끌진 못한다 할지라도 온몸을 던져 유익을 주는 식물인데.
  이렇듯 사람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천대 받는 이유는 너무 흔한 탓일 게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 시골로 들어서면 지천에 널린 게 호박이다. 귀할 것이라고는 없는 호박씨를 채마밭이나 담장 밑 아무데나 심어 놓아도 탈 없이 자란다. 손봐 달라고, 거두어 달라고 보채지 않는다. 한번 심어 놓기만 하면 돌보지 않아도 그만이다. 알아서 자라 온갖 유익을 준다. 크게 눈길을 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편안한 이웃 같다.
  흔하디흔한 호박이지만 그 쓰임새는 어디에도 견주지 못한다. 우선 된장찌개에 호박이 안 들어갈 수 없다. 호박 없이는 구수한 제 맛을 기대하기 어렵다. 칼국수나 수제비에도 빠질 수가 없다. 호박이 있어야 칼국수가 되고 수제비가 된다. 어디 그뿐이랴 입맛 없을 때 잔치국수 후루룩 말아먹으면 그만한 별미도 없다. 잔치국수에도 잘게 썬 호박이 얹혀야 제 맛이다. 비빔밥에도 호박 나물은 반드시 들어간다. 애호박 부침개의 그 씹히는 맛과 향기에 어머님사랑을 떠올려보지 않은 이 또 있을까.
  뭐니 해도 호박과 관련된 음식의 백미는 호박잎쌈이 아닐까 한다. 찐 호박잎에 밥 한술 떠 얹고 구수한 된장 한 숟갈 더하면 훌륭한 쌈밥이다. 그 위에 생선 한 조각 올릴라 치면 꿈에도 못 잊을 고향의 맛이 완성된다. 한입 가득 입에 넣으면 호박잎의 까칠한 맛이 혀에 느껴지고 이내 스르르 녹아버린다. 오래 기다릴 틈도 없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간다. 게장을 밥도둑이라 하지만 호박 잎 쌈밥 또한 밥도둑에 견줄 만하다.
  호박범벅은 또 어떠랴. 누런 호박을 삶아 범벅을 해먹으면 그 달콤하고 퍽퍽한 맛이 일품이다.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다. 한국의 맛이다. 어릴 적 기억속의 외할머니는 호박범벅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몇 년에 한번 집에 오시면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와 살림에 분주한 막내딸 모습을 애처로운 눈길로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굳은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이 곱게만 자란 딸이 과수원 일에 흠뻑 빠진 모습에 애가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 얼굴엔 늘 웃음이 가득 하셨다. 딸의 모습이 한편 대견스럽기도 하였으리라. 밭에서 딴 누런빛의 묵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만들어 드리면 맛있게 드시었다. 제일 맛있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언제나 호박범벅이 제일 맛있다고 하셨다. 호박범벅을 드신 게 아니라 딸을 향한 사랑을 드신 걸게다. 오십이 넘은 지금에야 호박범벅만 맛있다고 하신 이유를 겨우 알만하다. 지금도 호박범벅을 먹을 때면 하얀 치마저고리 입고 미소 띤 모습의 외할머님이 곁에 계시는 듯하다. 서양의 경우 어머니가 만든 닭고기 스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만병통치약이기도하고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는 호박범벅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호박은 썰기도 쉽다. 칼이 근처에 가기만 해도 썰어지는 듯하다. 고추나 양파를 썰 때처럼 맵지 않다. 순 하디 순한 시골처녀의 마음을 닮은 것일까. 호박은 속을 편케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위에 더없이 좋단다. 어머님이나 할머님의 약손 같다. 어린 시절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반듯이 눕히어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배에 얹으셨다. ‘내 손이 약손이오, 내 손이 약손이오, 내 새끼 낫게 해주오.’라고 주문을 외면 감쪽같이 나았다.
  서양에서는 10월의 마지막 날을 ‘할로윈데이(halloween day)’라고 부른다. 할로윈데이에 아이들은 드라큘라 같이 무서운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면 준비해간 주머니를 내밀며 ‘트릭오아트릿(trick or treat)’하고 외친다. 집 주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사탕이나 초콜릿을 한 주먹 넣어준다. 한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집 앞 정원을 장식한다. 해골을 걸어놓기도 하고, 마녀복장을 한 허수아비도 세운다. 현관 앞에는 ‘잭코랜턴(Jack O' Lantern)’을 놓아둔다. 잭코랜턴을 만들 때 사용되는 재료 또한 노랗게 익은 호박이다.
  너무 흔하여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는 호박이지만 자신의 온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노래한 시인의 노래를 떠올리며 나는 오늘 그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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