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잠화가 어떤 꽃인지 궁금했었다. 아침 산책길에 드디어 옥잠화를 만났다. 잎은 넓적하고 꽃송이가 커다랗고 하얀, 수줍은 모습의 옥잠화가 무리지어 피어있다. 우아한 여인을 연상케 한다. 아침이라 그런지 꽃잎이 활짝 열리진 않았다. 살포시 미소 띤 얼굴. 살짝 지나가는 향기도 맡은 것 같다.
2007년에 얻은 것 하나 말해보라고 하면 몰랐던 꽃을 만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제대로 이름을 들은 적도, 관심 있게 본 적도 없는 꽃-옥잠화, 원추리, 능소화, 맥문동-을 알게 된 것이다. 오십 줄에 들어선 내게 이들이 말을 건네 왔다.
왜 하필 그런 촌스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신의 이름처럼 이들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특별히 향기롭지도 않다. 자연히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다발 전해주며 내 마음이니 받아달라고 말할 만한 그런 꽃이 아니다. 장미나 백합, 튜울립, 안개꽃이 그렇듯이 말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고, 없어도 그만인 그런 꽃이다. 수줍음을 타는 듯 수수하게 피어있는 옥잠화. 가만히 다가가 말을 걸어야 마지못해 대답해줄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왠지 세상사는 기쁨이 조금은 덜 할 것 같은, 드러나지 않는 기품과 정겨움을 지녔다.
못살던 시절 우리네 큰 누님이 생각난다. 공부는 일찌감치 그만 두고 도회지 공장으로 나가 돈을 벌어 집안 살림을 돕던 누님, 뼈가 으스러지도록 농사일, 가사일을 도맡아 동생들 공부하는데 힘을 보탠 누님. 호사스러움은 본인과는 거리가 멀다며 좋은 건 식구들 몫으로 돌리고 묵묵히 일만 알던 누님. 겉치레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 얼굴에 주름만 가득한 누님. 옥잠화나 원추리는 희생만을 자신의 일로 아는 큰누나 같은 꽃이다. 언제 그들이 화려한 영광을 보기나 했을까. 그런 영광은 장미나 백합에게 내어준 지 오래다.
이런 꽃들이 올 여름 내게로 다가 왔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젊고 잘나갈 적에는 장미나 백합, 안개꽃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나이가 오십 줄에 들어서고, 잘나갔던 그 화려한 시절이 살짝 지나가자 옥잠화, 원추리, 능소화, 맥문동이 가만히 나를 찾아왔다.
사실 꽃은 언제나 그곳 그 자리에 있었다. 사느라고, 돈 버느라고 바빠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출세하려는 욕심에, 자녀교육에 정신이 팔려 꽃들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도회지에서 시멘트바닥만 밟으며 일하고,시멘트 바닥에 등대어 잠자고, 온통 회색으로 가득한 세계에 살다 보니 가까이 할 겨를이 없었던 게다.
늘 그 자리에 있으나 마음이 콩밭에 있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 소중한 가치들이 얼마나 더 많으랴. 부질없이 사라져 갈 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계속 하려는지. 생명, 의리, 진실, 진리, 우정, 우애, 사랑 이런 가치들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간과할 때가 많다.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세상 살다 가고 싶다. 보지 않는 곳에 수수하게 피어 세상을 더 멋스럽게 하는 꽃이 되고 싶다. 화려하진 않지만 함께하는 이들에게 은근한 힘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
알에서 깨어난 새들이 둥지를 떠날 때쯤이면 어미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횟수를 줄인다. 허기를 못 이겨하는 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둥지를 떠나 첫 비행을 할 때 잘 날 수 있도록 몸을 가벼이 해주기 위한 배려이다. 세상 욕심에 찌들려 마음에 비만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언제든 훨훨 날아갈 채비가 되어있으면 더 많이 얻는다. 잡으려고 애를 쓸수록 잡을 것 같으나 오히려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는 마음을 스르르 놓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앞으로는 한쪽 구석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피어있는 옥잠화나 원추리, 옥잠화, 맥문동 같은 꽃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을 능히 이기고 꿋꿋이 향기를 피우는 이들의 끈질김, 수수함, 이등 정신에 더 큰 박수를 보낸다. 닮고 싶다.
2007년에 얻은 것 하나 말해보라고 하면 몰랐던 꽃을 만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제대로 이름을 들은 적도, 관심 있게 본 적도 없는 꽃-옥잠화, 원추리, 능소화, 맥문동-을 알게 된 것이다. 오십 줄에 들어선 내게 이들이 말을 건네 왔다.
왜 하필 그런 촌스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신의 이름처럼 이들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특별히 향기롭지도 않다. 자연히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다발 전해주며 내 마음이니 받아달라고 말할 만한 그런 꽃이 아니다. 장미나 백합, 튜울립, 안개꽃이 그렇듯이 말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고, 없어도 그만인 그런 꽃이다. 수줍음을 타는 듯 수수하게 피어있는 옥잠화. 가만히 다가가 말을 걸어야 마지못해 대답해줄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왠지 세상사는 기쁨이 조금은 덜 할 것 같은, 드러나지 않는 기품과 정겨움을 지녔다.
못살던 시절 우리네 큰 누님이 생각난다. 공부는 일찌감치 그만 두고 도회지 공장으로 나가 돈을 벌어 집안 살림을 돕던 누님, 뼈가 으스러지도록 농사일, 가사일을 도맡아 동생들 공부하는데 힘을 보탠 누님. 호사스러움은 본인과는 거리가 멀다며 좋은 건 식구들 몫으로 돌리고 묵묵히 일만 알던 누님. 겉치레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 얼굴에 주름만 가득한 누님. 옥잠화나 원추리는 희생만을 자신의 일로 아는 큰누나 같은 꽃이다. 언제 그들이 화려한 영광을 보기나 했을까. 그런 영광은 장미나 백합에게 내어준 지 오래다.
이런 꽃들이 올 여름 내게로 다가 왔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젊고 잘나갈 적에는 장미나 백합, 안개꽃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나이가 오십 줄에 들어서고, 잘나갔던 그 화려한 시절이 살짝 지나가자 옥잠화, 원추리, 능소화, 맥문동이 가만히 나를 찾아왔다.
사실 꽃은 언제나 그곳 그 자리에 있었다. 사느라고, 돈 버느라고 바빠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출세하려는 욕심에, 자녀교육에 정신이 팔려 꽃들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도회지에서 시멘트바닥만 밟으며 일하고,시멘트 바닥에 등대어 잠자고, 온통 회색으로 가득한 세계에 살다 보니 가까이 할 겨를이 없었던 게다.
늘 그 자리에 있으나 마음이 콩밭에 있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 소중한 가치들이 얼마나 더 많으랴. 부질없이 사라져 갈 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계속 하려는지. 생명, 의리, 진실, 진리, 우정, 우애, 사랑 이런 가치들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간과할 때가 많다.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세상 살다 가고 싶다. 보지 않는 곳에 수수하게 피어 세상을 더 멋스럽게 하는 꽃이 되고 싶다. 화려하진 않지만 함께하는 이들에게 은근한 힘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
알에서 깨어난 새들이 둥지를 떠날 때쯤이면 어미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횟수를 줄인다. 허기를 못 이겨하는 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둥지를 떠나 첫 비행을 할 때 잘 날 수 있도록 몸을 가벼이 해주기 위한 배려이다. 세상 욕심에 찌들려 마음에 비만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언제든 훨훨 날아갈 채비가 되어있으면 더 많이 얻는다. 잡으려고 애를 쓸수록 잡을 것 같으나 오히려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는 마음을 스르르 놓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앞으로는 한쪽 구석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피어있는 옥잠화나 원추리, 옥잠화, 맥문동 같은 꽃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을 능히 이기고 꿋꿋이 향기를 피우는 이들의 끈질김, 수수함, 이등 정신에 더 큰 박수를 보낸다.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