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강변에서(금호강의 추억)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8. 4. 18. 01:34

<봄>
  밀려온다. 강물이 끊임없이 내게로 밀려온다. 금호강의 물줄기가 굽어 도는 강변의 찻집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몇 시간째 바라보고 있다.
  편안하다. 당연히 와야 할 곳에 와 있는 듯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졸린 눈 깜빡거리는 어린 가슴을 토닥거리는 엄마의 손길이 느껴진다. 흐르는 강물에 엄마 품속 같은 안온함이 있고, 고향 모습이 그려지는 건 왜일까. 강 건너편 멀지 않은 거리에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과수원은 강과 맞닿아 있었다. 금호강의 지천인 율하천을 끼고 살던 집이 있었다. 내를 경계로 전쟁놀이를 즐겼다. 한편은 이쪽에, 다른 한 편은 저쪽에 진을 치고 한판 전쟁을 벌였다. 타고 남은 연탄재가 무기이자 탄약이었다. 마구 던지며 적이 물러가기를 기대하였다. 놀이가 끝난 후 허연 연탄재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며 서로 웃었다. 나무 막대기를 잘라 칼싸움도 하였다.  금방 하루해가 저물었다. 날이 어둑해지면 왜 집에 들어오지 않느냐는 어머님의 성화에 아쉬움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갔다.
  살던 곳에서 한 집 건너 과수원은 재호네였다. 마당에 자두나무가 있었는데 한여름이 따먹는 커다란 자두 맛이 꿀맛이었다. 물이 많은 자두를 한 입 깨물어 먹는 그 맛. 신맛을 이기지 못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집에 없던 유와이라는 사과도 있었다. 파란색 유와이는 국광과 홍옥이 주종을 이루던 때라 신선하고 새로운 맛이었다. 수확시기가 가을인 국광과는 다르게 초여름에 수확을 해 입맛을 돋우었다.
  
  <여름>
  아이 걸음으로 이삼십 분 거리인 금호강으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던 강변으로 나가면 온통 내 세상이었다.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과 자유를 만끽하였다. 하얀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포플러 숲도 장관이었다. 투명한 유리알 같은 물웅덩이엔 송사리 떼가 무리 지어 헤엄쳐 다녔다.
  큰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는 강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다. 굽이쳐 흐르는 강이 온통 우리들 세상인 양 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퍼덕퍼덕 물장구를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힘껏 개헤엄을 쳤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힘이 쭉 빠졌다. 강바닥에 발이 닿았다. 꿈틀 하는 느낌이 발바닥으로 전해왔다. 온몸에 전기가 통한 듯 찌르르하다. 모래무치를 밟았다.  
  한여름 퍼붓는 장대비에 물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누런 황토물이 흘러내릴 땐 누구도, 무엇도 감당할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홍수라도 나려는 듯 무서운 속도로 휩쓸고 지나갔다. 
  하루는 대구에서 놀러 온 외사촌 누나, 동생과 사과 서리를 하러 갔다. 사과 몇 개를 서리해 먹는 맛이 그만이었다. 장난 삼아 사과 서리를 한 후 강둑에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물로 뛰어들었다. 사과밭 주인인 도 씨 할아버지가 어찌 아셨는지 강둑에 벗어둔 옷을 가만히 가지고 가셨다. 실컷 놀다 강둑으로 올라온 우리는 그제야 옷이 없어진 걸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 손이야 발이야 닳도록 빌어 겨우 옷을 찾아 입었다.    
  
  <가을>
  강변으로 가는 길옆 서 어르신 집에는 말을 매어놓는 마구간이 있었다. 말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살금살금 들어가 떨어진 말꼬리 털을 주웠다. 말총을 이용하여 덫을 만들고 매미 앞에 살짝 갖다 대면 울음을 멈추고 간지럽다는 듯 앞발로 살짝살짝 건드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총이 달린 막대기를 확 하고 잡아당기면 어김없이 걸려들었다. 배를 살살 간질이면 맴맴하고 울었다. 배의 아랫부분에서 갑자기 쭉 뿜어 올리는 매미 오줌으로 때 아닌 세수도 했다.
  비 갠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고추잠자리 떼가 낮은 비행을 할 때면 왕잠자리 잡기에 열중하였다. 암컷 왕잠자리 한 마리를 실에 매달아 ‘오다리, 오다리’하고 돌리면 수컷 왕잠자리가 순식간에 달라붙었다. 까마득히 하늘 먼 곳엔 비행기 지나가며 만든 하얀 구름자국이 길게 남았다. 강아지풀에 침을 뱉어 커다란 개구리 입 주변에 살랑살랑 흔들어 대면 무심코 응시하던 개구리는 폴짝 뛰어 강아지풀을 물었다.
  금호강변 포플러 숲은 사람들이 수시로 찾는 소풍 장소였다. 나무 아래 앉아 수건 돌리기도 했고 보물 찾기도 했다. 숲에 바람이 일면 쏴아아 소리를 내며 울었다. 금방 소나기라도 내릴 듯 하늘이 흐려지면 숲의 울음은 무섭고 음울했다.  
  
  <겨울>
  겨울의 금호강은 스케이트장으로 변했다. 인적 없는 강에 스케이트를 신고 들어가 속도를 내면 쩡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멀리 철새 떼들이 떼 지어 날았다.
  동무들과 전쟁놀이에다 매미 잡으러 뛰어다니던 추억의 장소가 사라질 운명이다. 개발붐을 타고 살던 동네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한다. 덤프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쉴 새 없이 지나다닌다. 포클레인 소리도 요란하다. 오래지 않아 유년의 추억이 깃든 그곳은 흉물스러운 아파트 단지가 덩그마니 들어 서리라.   
  다행히도 포플러 숲에 모래사장이 있었고, 아버님을 따라 피라미 낚시를 하던 금호강은 모습만 달리 한 채 쉼 없이 흐른다.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강둑에 와 앉게 될 것이다.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바라보리라.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몸부림칠 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다시 일어설 용기와 에너지를 얻게 되지 않을까. 가슴 깊은 곳까지 흘러들어와 시도 때도 없이 요동치는 욕심과 번뇌를 조금이나마 씻어 주리라.
  한 마리의 학이 사뿐히 강으로 내려앉는다. 한번 자리를 잡은 학은 미동도  않고 강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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