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인 (動 因)
이택희
살아가면서 무엇엔가에 홀린 듯 빨려들 때가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렇고 직업을 가지는 일도 그렇다. 때로는 운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선배는 키가 훤칠하고 잘생겼었다. 권력가 집안 출신인데다 재력이 있고 학벌까지 좋아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였다. 선배가 하는 일에는 거침이 없었다. 승승장구하여 윗사람들로부터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자신감과 자긍심이 바탕이 되어 일하다보니 때론 잡음이 들리기도 하였으나 늘 좋은 성과를 내었다. 일뿐 아니라 운동시합, 당구 등 잡기에도 능하였다..
지고 못사는 성격 때문인지 무엇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몹시 마음 상해했다. 일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땐 술로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차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간 기능에 이상이 온 것이다. 신의 부러움을 샀던 탓일까 시름시름 앓던 선배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갑작스런 비보에 주변 사람은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은 어이 말로 다할 수 있었으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선배의 아내는 하늘이 무너지듯 하였으리라. 하지만 무작정 슬픔에 잠겨있지만은 않았다. 어느 날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 선배께서 하시던 사업을 이어받았다.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을 보란 듯이 잘 키워보리라 다짐도 했을 것이다.
남편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경황이 없었지만 자식을 생각하며 꾀를 내었다. 평소에 잘 지내던 남편의 직장 상사를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얀 거짓말을 하나 해주십사고 부탁을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이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었다고 말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던 선배의 상사는 당연히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부하 직원의 아들과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살아있을 때 네 아빠같이 훌륭한 사람도 없었다. 책임감이 강했던 너희 아빠는 생전에 너를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너를 향한 기대도 컸었다. 아빠는 네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고 말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고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는 의과대학에 당당히 합격했다. 선배의 아내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가운데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아들을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6월 초 LA 교민 회장이자 뉴스타(new-star)부동산 그룹 대표를 맡고 있는 남모 회장을 만났다. 대화도중 자녀들에게 태몽을 하나씩 만들어 주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태몽이 있다면 수시로 말해주고, 없다면 하나 만들어서라도 들려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자녀의 장래를 위하여 신화 같은 꿈 이야기를 만들고 반복하여 들려주면 그 꿈이 정말 자신의 꿈처럼 되어 질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공감이 갔다. 꿈은 어차피 꿈 아니겠는가. 그 꿈을 자신의 꿈으로 만들어 마음에 품고 노력하다보면 그대로 되어질지도 모를 일 아닌가.
어머님은 큰 아들의 태몽이 무척 좋았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의 꿈을 단단히 믿었다. 꿈 이야기 때문인지 살아오는 동안 희망이 별로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늘 낙천적일 수 있었다.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노력만 하면 남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항상 지니고 살았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임에도 가끔 태몽이야기를 들려 달라 조른다. 어머님은 몇 번이고 웃는 낯으로 태몽을 말씀해주신다. 큰 물고기가 솟구치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꿈속으로 빠져 든다. 반드시 꿈을 이루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노라 다짐도 한다.
갓 성인이 된 딸들에게 간난아기 때의 이야기를 종종 들려준다. 너는 열정이 있었으며 지혜로운 아이가 되리라는 계시가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낙천적인 아이였다.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이들 역시 자신의 태몽이나 간난장이 시절 이야기 듣기를 은근히 즐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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