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와의 교감
이택희
겨울 동안 추위에 얼어있었던 잎을 떨어트린 자국이 누렇게 남았다. 누런 잎을 긁어내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준다.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역력하다.
물을 주어 잔디를 자라게 하고 자라면 깎는 일을 반복하니 시지프스의 신화가 생각난다. 있는 힘을 다해 돌을 산꼭대기까지 올리면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이 잔디도 힘이 없을듯하면 물을 주어 자라게 하고 어느 정도 자라면 깎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다 부질없는 일인지 모르나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한다.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일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의미 없는 일에 목을 매어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 캐나다 토론토엔 잔디 깎는 기계도 여러 종류가 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깎는 기계가 있는가 하면 휘발유를 넣어 자동으로 날이 돌아가게 하여 밀고 다니는 기계도 있다.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계도 있고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밀고 다니는 것도 있다. 휘발유를 넣고 움직이는 기계가 가장 흔하다.
집에서는 사람의 힘으로 밀고 다니는 기계를 쓰고 있다. 깎을 잔디도 많지 않을뿐더러 밀고 다니면 운동도 되겠다 싶었다. 잔디를 자른 후 트리머라는 기계로 귀퉁이에 남겨져 있는 긴 잔디를 깎아 낸다. 머리를 자를 때 기계로 한번 잘라 낸 뒤 가위로 다듬어 주는 것처럼 보기 좋게 손질하는 것이다. 잔디를 자른 후에는 갈퀴(rake)로 끌어 잘려나간 부분을 한데 모아 봉지에 담는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쓰는 것과 동일하다.
잔디 씨는 아무것도 없는 듯이 가볍다. 땅에 심어 싹이 날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반신반의하며 잔디 씨를 땅에 묻고 흙을 살짝 덮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어린 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손같이 귀엽고 앙증맞다. 파랗게 돋아나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것인가.
잔디 떼를 사서 입혀버려도 될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 더욱 손쉽고 경제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잔디 씨를 뿌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렸다. 이후 싹이 돋아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기쁨에 푹 빠져 있다.
때로는 잔디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 잘 있었냐고 인사를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기도 한다. 잔디가 마음의 소리를 알아듣는 듯하다.
잔디를 잘라주면 상큼한 풀냄새를 풍긴다. 긴 머리를 잘라 고를 때의 그 신선함을 식물도 느끼는 것일까. 푸릇한 냄새가 어린 시절 고향집 과수원을 상상케 한다. 잔디를 깎은 후 시원하게 물을 뿌려주면 어린아이 같이 좋아한다.
아버님은 오십대 초에 새로운 집을 짓고 마당에 잔디 떼를 입히셨다. 잔디를 입히시고는 손자손녀들이 텐트를 치고 노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잔디가 길어지면 낫으로 잔디를 자르셨다. 잔디 깎는 기계가 없어서였으리라. 어쩌면 몸에 밴 절약정신 때문에 돈을 아끼려 잔디 깎는 기계조차 사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길게 자란 풀도 아니고 나즈막이 자라는 잔디를 낫으로 깎으려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나중에는 마당에 모든 잔디를 떼어내고 고추, 가지, 부추, 파 등을 심으셨다.
모종을 한 후 채소를 손보시며 객지에서 생활하는 자식들 생각을 하셨으리라. 자식 돌보듯 심어놓은 채소를 돌보지 않았을까. 당시는 부모님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 때 아버님 연세가 되자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져가나 보다.
집 뒷마당 잔디와 연못이 맞닿아 있다. 연못엔 기러기와 청둥오리 한 쌍이 노닌다. 좀 있으면 새끼와 함께 헤엄치며 유유자적하는 기러기 가족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 잔디와 연못, 기러기가 멋진 조화를 이룬다.
잔디를 깎으며 아버지를 생각하고 머지않은 장래에 아이들이 그 일을 이어받으리라 생각하듯이 기러기도 그렇게 세대를 이어가는 것일 게다. 어디 기러기만 그러랴. 땅위에 돋아나고 있는 이름 없는 풀 역시 그런 방식으로 종족을 이어가며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닐까.
연못에 고인 물조차 순환이 있음이다. 들어오는 물이 있고 나가는 물이 있다. 여름내 푸른 하늘과 떠가는 흰 구름, 수면위로 찰랑이는 물결과 숲 그리고 잔디와의 교감을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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