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정예형 초청 연주회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5. 8. 5. 06:27

고등학교 동창인 그를 대학 교정에서 다시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사실 약간은 뜻밖으로 생각되기도 했지만.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별도로 모아 공부시키는 특별반 학생이었다. 12개 클래스였던 당시 모교는 문과 이과 각 한 개 클래스를 특별반이라는 명목으로 운영했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만 따로 모아 공부를 더 시켰었다. 일종의 여왕개미 클래스라고나 할까. 특별반 학생들은 대부분 S대 등 서울의 명문대 혹은 지방 공립대의 인기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런데 친구를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만난 것이다.

친구는 행정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그 시절 고시에 합격하면 마치 장래가 확실히 보장이나 되는 것처럼 부러워하곤 했다. 교문을 지나 학교로 올라가는 길 중앙에 000 행정고시 합격같은 플래카드가 나붙기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구는 고시의 1차 시험에 세 번이나 합격하여 기대를 모았지만 2차 시험에서는 번번이 나가떨어지곤 하였다. 나는 그가 실력은 충분히 있었으나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필체 때문에 떨어진 것이라고 늘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친구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추고 몇 년 동안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친구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으나 실패하곤 했다. 도무지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학교 근처 정릉의 한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취직한 후에도 자취 집을 정릉 인근에 얻어 출퇴근하였기에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했었다. 무성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였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친구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토론토의 한 신문에서였다. 이스라엘에서 구약 학을 전공한 박사이자 이스라엘 현지의 대학교수가 토론토에 와서 강연한다는 대문짝만한 광고였다. 유대민족에 대해 유달리 알고 싶은 것이 많던 차여서 그 광고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강사로 온다는 교수의 이름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늘 궁금해했던 옛 친구의 이름이었다.

언젠가 친구가 이스라엘로 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을 생각해내었다. 당시 홀연히 광야로 사라진 모세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강연하러 온 친구를 만나러 갈까 하는 생각을 몇 번씩 했지만 그만두었다. 괜히 만나서 옛날을 떠올리게 하면 강연에 방해를 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데 지분거리며 다니던 때를 기억하게 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후 친구는 한두 차례 더 토론토를 다녀간 것으로 알고 있으나 늘 같은 생각을 하며 찾아가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친구가 떠나고 며칠이 지나면 왜 친구의 강연에 찾아가서 만나지 않았을까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그것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이번에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가 누군가가 토론토에 와서 공연을 한다는 광고가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모 신문 1면 하단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개인적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하여 광고에 눈길이 갔다. 젊은 연주자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신동이라는 표현은 좀 과장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비교적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재능 있는 연주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맨 광고 아랫단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부친 정00 박사는 이스라엘 선교사이며 예루살렘 성지대학(University of Holy Land) 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친구의 아들이었다. 우연치고는 재미있는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나 또한 막냇동생에게 바이올린을 전공할 것을 권유하였고 지금도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둘째 아이에게도 바이올린 공부를 하게 한바 있다. 그런데 친구의 아들도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으니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 아닌가.

예술가의 길이란 멀고도 먼 길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하지만 재능이 있고 좋아하기만 하다면야 꼭히 가지 못할 길도 아니리라. 일정이 바쁘더라도 이번 정예형 군의 연주만큼은 반드시 참석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힘찬 박수로 젊은이의 장도를 축하하며 황홀한 선율 속에 빠져들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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