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이 생활했던 거실과 방 그 공간에 가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안하다. 낮은 곳으로 내려갔던 그분의 삶을 생각할 수 있어서인가. 그냥 마음이 편안하다.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세상에 왔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 갔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작은 불씨 같은 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벽난로 위쪽에 걸린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환'은 더욱 나를 편안하게 한다. 붉은색 톤으로 그려진 그림은 어쩌면 편안하기보다 도발적으로 보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은 보면 볼수록 편안하다.
아버지 품에 내가 안겨있다는 상상을 해서일까.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이 꿇어앉아 아버지 품에 안겨있고 아버지는 아들의 등에 손을 얹고 아들을 감싸 안는다. 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아들이 나라는 상상을 해본다.
캐나다로 떠나오던 날 아침 아파트 경비실 앞 주차장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안아드렸을 때 가슴에서 느껴지던 심장의 박동을 생각해본다. 어쩌면 손 안에 든 참새의 심장이 뛰는 것 같았던 아버지의 심장 박동, 젊은 시절 떡 벌어진 어깨가 아닌 왜소할 대로 왜소해진 어깨, 하지만 내게 아버지의 품은 대지 같이 넓었고 군불로 데운 구들목같이 따뜻하였다. 그런 아버지 품에 안긴다는 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가.
그곳에서 나는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를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 그 장소가 헨리 나우웬이 생활하던 그 공간 같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였다. 그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에서 절대자를 만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생각 자체도 내려놓고 싶었다. 그리고 절대자의 품에 안겨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헨리 나우웬이 기거했던 공간 거실에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가 뻗어있고 흰 눈이 쌓였다. 11월 중순이지만 최근에 내린 두 번의 폭설로 대지가 온통 흰 눈으로 덮였다. 흰 눈으로 덮인 대지와 숲, 연하여 보이는 동네 집들의 지붕 위로 맑은 햇살이 내려앉는다. 며칠 동안 날이 흐리고 눈이 왔는데 오랜만에 비치는 햇살이 다사롭다. 마치 그곳은 그래야만 하는 듯이. 덩달아 마음도 맑아진다. 언제나 그렇듯 데이브레이크 Cedars Retreat House 그곳은 밝은 빛이 있는 아늑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그곳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하며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싶었다. 말을 적게 하면서, 아니 아예 말하지 않으며 침묵 속에서 경건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 노력은 했지만 온전히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벽난로 위에 놓인 액자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When we have really met and known the world in silence, words do not separate us from the world or other men, nor from God, nor from ourselves because we no longer trust entirely in language to contain reality’-Thomas Merton-
앞으로 일상의 삶 속에서 자주 침묵하며, 절대자의 품 안에 안겨 안식하는 시간을 늘리리라 다짐했다. 2019년 11월 15~16일
<침묵의 신비>
침묵은 내면의 불을 간직하게 해 준다. 침묵은 신앙적 정서의 내적 열기를 지켜준다. 이 내적 열기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생명이다. 침묵이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불을 잘 간수하여 늘 살려 두는 훈련이다. 포티케의 디아도쿠스 주교가 아주 생생한 비유를 들려준다.
“한증막의 문을 계속 열어 두면 안의 열기가 금세 빠져나간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입이 근질거리면 말이라는 문으로 하나님의 잔상을 다 날려 보낸다. 아무리 선한 말이라도 상관없다. 그러고 나면 지식인은 사고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는데도 아무한테나 혼란스러운 생각을 마구잡이로 쏟아낸다. 지성에 망상이 끼어들지 못하게 막아 주시는 성령을 외면한 결과다. 가치 있는 사고는 늘 다변을 삼가며 혼란이나 망상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때에 맞는 침묵은 소중한 것이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고의 어머니다.”
때로 우리가 다변은 믿음의 표현이라기보다 오히려 회의의 표현으로 보인다. 마치 사람들의 심령을 만지시는 성령의 능력을 확인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말로 그분을 도와 드리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능력을 납득시키려 한다. 하지만 내면의 불은 그 말 많은 불신 때문에 꺼진다. -헨리 나우웬-
<고독한 삶의 소명>
고독한 삶으로 불림 받는 다는 것은 숲과 산, 바다, 사막의 광활한 풍경의 침묵에 자신을 넘겨주고 건네줌으로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태양이 대지 위로 떠올라 그곳의 침묵을 빛으로 가득 채우는 동안 말없이 앉아 있음이다. 아침에는 기도하고 일하며, 낮에는 노동하고 휴식하고, 밤이면 다시 묵상 중에 고요히 앉아 있음이다. 밤이 대지 위에 내려오면 어둠과 별들이 침묵을 가득 채운다. 이것은 참되고 특별한 불림이다. 기꺼이 그러한 침묵에 완전히 속하고자 하고, 이 침묵이 뼛속까지 스며들게 하며, 침묵 외에는 아무것도 호흡하지 않고 침묵을 먹고 살며, 그 삶의 본질을 살아 깨어있는 침묵으로 변화시키려는 이는 거의 없다.
-토마스 머튼, ‘고독 속의 명상’ 131~132쪽 중에서
(헨리 나우웬이 기거했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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