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가정의 달, 고독을 생각하다/이주향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6. 5. 15. 01:39

<가정의 달, 고독을 생각하다/이주향>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가족을 강조하는 날들이 모여 있는 가정의 달이다. 당신에게 엄마는, 아빠는 어떤 존재인가, 주고 또 줘도 아까운 게 없고, 받고 또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이기만 한가. 혹, 사랑한 만큼 기대하고, 기대한 만큼 외로워지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형제자매는? 우애도 배우고, 연대도 배웠지만, 또 갈등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지 않았는지. 좋을 때는 가까운 친구지만 못마땅할 때는 진짜 아픈 적이었던 적은 없는지.
  어린 시절 본능적으로 쏟아 내렸던 사랑은 다 잊고 부모를, 가족을 버거워하는 이들이 많고,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럴 수 있냐며 남은 것은 허탈감뿐이라고 자식을 향해 시위하는 부모도 꽤 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얽히고설킨 진한 인연의 영혼들이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길을 잃기도 하고 찾기도 하는 곳, 어쩌면 그곳이 모두가 영원한 평화를 꿈꾸는 가정이라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융이 말했다.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였다고. 들끓고 가라앉으며 그 형체를 드러내는 무의식의 거대한 에너지가 평온을 찾아가면 비로소 알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우주가 제기한 하나의 물음이다!” 개성화를 중시한 융이 노년에 발견한 사실이다. 내가 겪었던 소란과 혼란이 어떻게 나를 나로 만드는가. 어찌하여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 살아보려 애쓸수록 수렁에 빠지던 날들이 실은 ‘나’를 받치던 거대한 무의식이 형체를 만드는 날들이었음을 고백하며 홀연해지기까지 내가 만난 최초의 우주, 가족은 내가 풀어야 할 주요한 실타래, 운명의 실타래다.
  어렵게 한발 한발 걸음마를 떼는 우리를 독려했을 엄마·아빠의 박수 소리, 웃음소리가 분명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다. 넘어지고 또 넘어질 때마다 괜찮아, 괜찮아, 하는 따뜻한 목소리에 힘이 나, 아픈 줄도 모르고 다시 일어났던 시간, 그 시간들은 부모에게나 우리에게나 분명 사랑의 시간이었다. 무엇에 홀린 듯 사랑했던 그 시간들은 세상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랑이 성장을 가로막는 지붕이 될 수도 있다면? 4살 때부터, 7살 때부터 세상의 실력자로 키우겠다며 시간을 쏟아 넣고 돈을 쏟아 넣고서는 이제 쏟아부은 만큼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는 부모의 사랑 혹은 기대엔 공격성이 있다. 기대하고, 간섭하고, 비교하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는 이들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상대에게 자기 집착의 무게를 얹는 것이다. 특히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려는 의지가 생길 때 그때가 되면 기대에서 오는 간섭, 닦달 혹은 평가는 대부분 짐이다.
  사랑에 빠져본 후에는 아는 것이 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랑은 집착해서 시작한다는 것! 사랑이 집착이 아니라는 말은 사랑의 고통의 겪어본 후에나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이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담담한 거리라는 깨달음이 온다. 그때에도 너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은 나뿐이야,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심장도 내어줄 수도 있어, 라며 자식을 통제하려는 부모는 오히려 괴물이다.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심장이 아니라 부모를 떠나 내 심장으로 사랑하고, 내 판단으로 세상을 사는 ‘독립’이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떠날 수 있어야 하고, 떠나는 자를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관계엔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가 역할의 윤활유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매달리거나, 왜 그 모양밖에 안 되느냐고 짜증을 내며 공격하는 일이 일상이라면 어쩔 수 없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멀어지는 수밖에. 가족인데 어떻게…, 그것은 사랑도, 도리도 아니다. 상대가 놓은 덫에 걸려 죄책감에 끌려다니는 것이고,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며,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작은 마을의 정원사였던 울라브 하우(Olav H. Hauge)가 쓴 시 ‘당신의 정원을 보여주세요’는 가까운 사이를 위한 노래 같다. “우리 만남을 위해 오실 때/ 경비견을 데려오지 마세요,/ 굳은 주먹도 가져오지 마세요./ 그리고 나의 호밀들을 밟지 말아주세요,/ 다만 당신의 정원을 보여주세요.”
  경비견과 굳은 주먹이 판을 치는 세상, 그 세상에서 때론 가족이 경비견이다. 경비견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서는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무의식과 세상의 편견 혹은 상식이 부딪쳐 어마어마한 혼돈을 낳고 있을 때 그때 ‘나’를 일으키는 것은 결국 ‘나’일 수밖에 없으니. 당신은 혼자 밥을 천천히 맛있게 먹는 것을 즐기는지, 자기만의 방을 정리하며 청소하는 일이 평화로운지, 혼자 여행하는 일이 자유로는 지. 시간이 되면 폰을 끄고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접을 수 있는지.
  살다 보면 비바람이 불어와 익숙했던 세계가 쓸려 가는 때가 온다. 좌절에 좌절을 더하고, 애를 쓸수록 믿었던 관계에 금이 가면, 할 수 없다. 힘을 빼는 수밖에.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부서지고 해체되고 썩어가는 과정인 건데 생각보다 그 고독의 행行은 안온으로 귀결된다. 고독의 맛을 알게 되면 ‘나’를 고독 속으로 밀어 넣은 그 인연이 고맙다.
  -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