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하나님이 만드신 참 좋은 나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5. 11. 10. 00:52

115일부터 7일까지 궬프(Guelph Bible Conference Center)에서 열린 장막장이 트레이팅 캠프에 다녀왔다. 삶의 주인이신 그분께로 나아가고 싶은 강열한 열망있었고 내가 누구인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생각하며 다짐하고자 하는 갈망도 있었다.

개회예배에서 리더 강찬영 형제는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는 자가 되자고 하셨다. 가슴에 새기고 삶의 습관이 되도록 해야할 소중한 교훈이었다. 기회있을 때마다 꺼내 읽으며 이정표로 삼고 싶어 댄 스니드 목사님의 강의를 올려둔다   

30회 장막장이 트레이닝 캠프 개회예배 강찬영 형제 말씀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는 자

예레미야 15 19절 "여호화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 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찌니라.”

우리는 귀한 것에서 천한 것을 취할 때가 많다. 그러나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천한 것 가운데 귀한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택희의 적용 : 20여 년 전 어린 딸아이가 교회의 의자를 양손으로 집고 그네를 타듯하다 넘어졌을 때 빨리 일어나라고 다그치고 얼굴을 찌푸렸던 적이 있다. 얼마나 성숙하지 못한 일이었던가)

천한 것은 내 스스로의 생각 가운데 취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계획은 천한 것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찾고 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보면서도 부족한 것을 보고 한탄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 가운데서 귀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낙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귀한 것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취한다는 것은 뽑아낸다는 의미이다. 익스트렉트하라는 의미이다. 귀한 것을 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연약한 것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반드시 보여주신다.

  삶 가운데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결정해서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기다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을 할 때 가치있는 것, 귀한 것을 말하자.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꺼낸다는 것은 격려하고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입술에서 선한 것, 귀한 것, 복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습관을 가지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신명기 30 11절과 14절에 그렇게 나와 있다. 우리의 말 가운데 천한 것을 선택하지 말고 귀한 것을 선택하자. 복된 말을 하도록 노력하자. 

우리에게 대가를 지불하기를 원하시는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가를 지불하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대가를 지불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나.

고난 가운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닐까. (환란 가운데 귀한 것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하면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을 내 말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영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는 자가 될 때 주신다. 삶의 현장에서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자. 복이 되는 이야기를 하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자.

2015 11 6일 아침 묵상/시편:139 13~18말씀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함께 있나이다.” 하나님꼐서는 내가 형질이 결정되기도 전에 미리 보시는 분이셨다.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Dan Sneed 목사님 강의

깨어짐에서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신 것을 깨달으면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준다. 성령님의 만지심이 우리의 삶을 언제나 신선하게 만들어 주신다. 성경이 떨어질 정도로 읽었다. 안에도 노트를 해두었다.(댄 스니드)

 

<새로운 정체성의 능력 the power of a new identity>

1.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 의도하신 목적

당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창조하실 때 생각하셨던 것 만큼 놀라운 것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으셨을 때 그의 마음에 계획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삶이 굉장히 멋지기를 기도한다.”

저를 무엇이 되기를 원하시며 창조하셨습니까? 나는 너를 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믿는다. 놀라운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셨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어떤 것이든 당신이 가진 것을 취하셔서 -그것이 어떤 상처이든 간에-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그분은 우리들 각자를 위해 예정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골로새서 1 15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고 그의 모든 창조물 안에 두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보았습니다.” 1) 땅을 다스리고 개발하는 것에 있어 동의함. 하나님은 언제나 관계적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파트너가 되어 땅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2)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3)그분은 각자 개인을 위해 예정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꿈과 계획을 각자에게 주셨는데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능력을 우리들 각자에게 두셨다. (댄 스니드)의 소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 정복하는 것에 대한 준비 (Preparing for conquest)

민수기 13 25-33절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로 살았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버지, 자신의 할아버지까지 노예로 살았다. 왕은 그들이 번성하여 이집트를 장악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두려워했다. 바로왕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바로왕은 유대인의 잠재력을 보았다.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을 어두움의 왕국이 더 잘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대인들 속에는 400년동안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노예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 있었다.

12명의 정탐군을 보냈다. 정복을 위해 준비하기 위해서 보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땅이었다. 하지만 정탐군들은 우리는 메뚜기 같았다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잠재력을 보면서도 갈 수 없는 모든 이유를 나열한다. 내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위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들여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의 눈에 스스로 메뚜기 같아 보이는 게 문제이다.

능력있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만한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종종 잊곤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나의 강점과 약점을 압니다. 나의 약점이 강점보다 훨씬 큽니다.”

3. 차이점 이해하기 (Understanding the difference)

정체성은 당신이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라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으나 자신들은 그것을 잊어버렸다.

자아상(self-image)과 정체성(identy)은 같은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하나님이 보시는 나가 나의 정체성이고 자아상은 내가 나를 누구라고 보는 가이다. ‘나 자신에 대한 정신적 그림이 자아상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나의 이미지이다. 자아상이 우리의 삶의 경험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면 - 어린 시절 상처는 자아상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다. 대부분의 자아상은 실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메시지가 거짓말로 나에게 왔는데 그 거짓말, 거짓 믿음안에 갇히면 안된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토대가 되면 안된다. 노예로 살았던 400년동안 경험이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게 했다. 셀프 이미지도 이와 같다. 어린 시절 상처가 당신을 메뚜기 같아 보이게 한다. 하나님의 능력-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바위에서 물을 나오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기적을 보이신-은 잊어버리고 잘못된 자아상 때문에 스스로 메뚜기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거기에 갇혀버린다. 우리의 모든 상처는 어떤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데 그 잘못된 메시지가 우리를 가두어 버리고 잘못 정의한다.

40년동안 광야에서 헤메는데 나이든 사람들이 다 죽고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 하겠다고 여겼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그 산을 배회하셨다. 구름이 그들을 보호하고 계속 음식을 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지만 그 백성들, 그 세대는 그 땅을 취하지 못했다. 왜냐는 자신을 메뚜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재력으로 가득하게 만드셨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것을 경험하고 그것이 우리를 잠궈버린다. 스스로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런 삶을 산다. 우리를 실패자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실패자의 삶을 산다. 하지만 우리를 성공자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라는 생각이 우리의 이미지이면 우리는 그런 삶을 산다.

4. 당신의 삶을 형성하는 개념들

질문: 당신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는가 입니다.” A.W. Tozer

당신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보는가 입니다.” C. S. Lewis

이 둘은 다 중요한 것이다. 열쇠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이다. 댄 스니드는 C.S. Lewis가 맞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눈에는 아담의 종류가 있고 또 다른 부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온전히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절실하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이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으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용납이다. 그분은 우리의 타락,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알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죄의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셨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분이 그분이시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시듯이 우리를 보신다. 하나님은 나를 용납하시고 인정하시는데 예수님을 용납하고 인정하시듯 하신다. 아들을 보시는 것과 똑 같이 우리를 보신다.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다 정리해 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용납하신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로 보시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온전히 용납받고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보신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시듯이 우리를 보신다.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자아상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상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해 보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것과 같아지기를 원한다. 고린도후서 5 17절에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보고 계신다. 예배소서 1:11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이고 누구를 위해 사는지를 말씀하신다. 자아상은 스스로 가진 자신에 대한 정신적인 그림이다.

우리의 도전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것은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말씀과 늘 가까이 있지않으면 우리는 쉽게 옛 거짓말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계속해서 받아들어야 한다.

당신의 삶을 정의하는 4가지는 개념들

1)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로 보는가.

2)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보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가.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용납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시듯, 예수님을 용납하시듯 우리를 용납하신다. “너는 충분하지 않아 너는 그분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 그런 말은 사실이 아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가져보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가두어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에게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갖혀있는 것을 본다.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본다. 많은 남성들이 그런 결함을 가진 것을 본다.

  뉴욕에 있는 제자 훈련학교에서 최고의 명문대학들 학생들에게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35-4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정체성에 대해 가르쳤다. 반쯤의 학생들이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했었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거짓 목소리에 영향을 받았다. 최고의 자리에까지 왔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자신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 자녀들이 아버지와 나는 감정적인 교류가 없었다고 말한다. 한국 아버지들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공급자이다. 공급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하지만 자녀들과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본다. 마음 안에 자녀들과의 깊은 연결감(emotional tie)이 부족한 것이 문제는 아닐까.

  감정적인 연결은 너무나 중요하다. 아버지와의 관계 뿐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아버지와 감정적인 연결이 잘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있는가는 중요하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에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영향을 미친다. 성령님이 이 부분에 관여하셨으면 좋겠다.

어른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마음의 일이다.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너(honour)이다. 공경은 가슴에 아픔을 묻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면 믿을 수 있는 분을 찾아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감정적인 관계, 혹은 연결이 없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녀나 아내에게 그 문제를 그냥 전가해 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려주셨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지도 모른다. 구약의 하나님이 하나님 전체가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3)  당신은 어떻게 자신을 바라보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 내 삶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이것을 알고 있는데 삶의 경험과 썩여 깨어져 버리곤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자.

4)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 사람들에 대해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삶을 규정한다.

우리의 행동은 대부분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반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대부분 일치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으로 행동하게 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깊이 믿는 것과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출발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생각이 행동을 이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야 한다.

정체성은 한꺼번에 변한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받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한번에 변한다. 하지만 셀프 이미지는 순차적으로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믿어야 한다. 그분이 나를 위해 기대하시는 꿈과 기대를 믿어야 한다.

신자들이 가진 큰 문제 중 하나가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것에 상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다. 원망하는 사람과 관계를 가질 수는 있지만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신 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나로 충분해.”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너로 충분해.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너무도 존귀한 존재야.”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들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본다. 경이롭다. 나도 하나님꼐서 너무도 아름답게 경이롭게 신묘막측하게 만드셨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만드신지 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나를 좋아한다. 나를 좋아하게 되자 내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나 자신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졌다.

당신의 일은 기이합니다. 하나님 나는 나를 좋아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만드실 때 잘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시편 139편 말씀이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때 주위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

<거짓말과 견고한 진 (Lies and strongholds)>

계속해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 진리들이 내 안에 있는 거짓말들을 쫓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상처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가치나 벨류, 우리가 어떤 사람이며 우리가 무엇과 비슷한지를 말해준다.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인지 계속해서 규정하려 한다. 이것이(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잘못 알려준 것들) 우리의 자화상이 되고 심령체계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속에서 우리를 그런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우리의 맘 속에 깊이 박혀있는 거짓말이 우리에게 사실이 아닌 말들을 하고 있다.

오래전의 상처가 메시지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일어난 일에 대해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선택하므로 감정적인 거짓말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들도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선택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대한 견해를 만들어 준다.

우리의 불행, 행복하지 못한 기분과 감정적인 상처는 우리가 말해주는 거짓말에서 온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상처주는 것이 다른 사람이 상처준 것보다 많다. 나 자신이 나에게 감정적으로 고통을 주고 불행한 것처럼 스스로 만들고 있다. 거짓말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Foundational Lies>

구약에 나오는 견고한 진의 예는 모든 성의 중앙에는 견고한 진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다. 성이 공격을 받을 때 왕이며 지도자들이 그 견고한 진으로 가게 된다. 영적인 견고한 진이라는 것은 우리의 심령체게 믿음체계 안에 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그곳을 통과한다. 깊이 묻혀있는 부정적 생각들이 우리 속에 갖혀있으면서 우리 생각들을 주관한다. 내가 왜 그것을 믿어야 할까? 왜 그 말을 믿어야 할까?를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영적인 견고한 진은 사단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깊이 믿었던 거짓말이 기초가 된다. 거짓말들이 우리의 신념체제에 기초가 된다. 기초적인 거짓말 위에 우리의 삶이 세워질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의 방식이다.

예가 있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라는 생각속에 잡혀 있다. 이것은 거짓말인데 여기에 갖혀있다면 우리는 이 완벽주의에 있게 된다. 결국은 많은 상처와 아픔 가운데 있게 된다. “내가 중요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정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의 가치, 중요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의 벨류는 우리가 얼마나 잘하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완전히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가치있는 존재이다. “괜찮아. 나는 참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 되기위해서는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치를 이미 두었다. 탁월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가 거기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나는 실패하면 안된다. 실패하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를 묶는다. “우리가 문제를 직면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이다. 나는 변할 수 없다.” 이것은 거짓말의 예이다.

모든 상처는 메시지를 가져다 준다. 한 아버지가 아이를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고 나를 떠난 것은 나의 잘못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경우는 많은 분노가 있게 되고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는 데 학교에서 내가 잘할 필요가 어디에 있어라고 하는 것이 감정적인 기초일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기초적인 거짓말이 영적인 견고한 진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거짓말들이 우리를 사로 잡게 놓아두면 안된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우리가 어떤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감옥에 있던 사람을 조사해보니 깊은 상처와 연결되어있었다. 믿고 있었것을 통해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견고한 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How spiritual strongholds are established)>

첫번째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형성된다. 어떤 충격적이거나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에의해 생긴다. 두번째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서 생긴다. 가족적인 유전-문화적인 유전-도 있고 종교적 배경에 의해서도 생기고 교육에 의해서도 생긴다. 이것을 막는 길은 내 안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경적인 것에서 오는 것도 있다. 환경은 우리의 가정환경이나 다녔던 학교의 환경이나 살았던 동네의 환경, 친구들 등을 이야기 한다. 또 한가지는 우리 스스로의 불순종과 죄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지 않았을 때 그것이 견고한 진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길로도 영적인 견고한 진이 쌓일 수 있겠지만 위에서 든 예들이 견고한 진의 형성되는 길이다.

<Understandingthe nature of spiritual strongholds>

어떤 시점에서 이런 견고한 진은 사단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이 견고한 진은 우리가 깊이 믿고 있는 거짓말로 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가진 수치심에서 이것이 더 강화된다.

수치심은 이것에 대해서 말도 하지 말아라.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치심이 많은 부분을 파멸시킨다. ‘너는 충분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숨겨 놓고 덮어버려라고 속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수치심에 의해서 지속되고 강화되며 intimidation(위협)-너는 도데체 이것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이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다. 거짓말을 더욱 강화시켜준다. 수치심과 위협은 우리안에 있는 거짓말들을 강화하기 위해서 있기도 한다.

<우리가 어떻게 견고한 진을 깨트릴 수 있는가? (How to demolish spiritual strongholds)>

요한복은 8 31-32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방법이 견고한 진을 파하는 것이다.

첫재 우리 안에 있는 거짓말을 밝혀 내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이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기에 거짓말로 보기가 어렵다. 거짓말을 볼 수 있는 길은 성령(진리의 영)의 인도하심이다. 성경 말씀이 거짓말을 보게 한다.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 수록 견고한 진은 무너지고 거짓말이 밝혀지게 되어있다. 진리가 거짓말을 쫓아낸다. 이는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진리(말씀)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령님이 거짓말을 알려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우리 안에 있도록 해야 한다. 성공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를 원하면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유하게 살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서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 거짓말 들을 진리로 지켜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 책이다.

진리를 우리의 생각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무슨 거짓말에 속고 있나를 생각하지 말고 성령님께서 우리가 믿고 있는 거짓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라. 이것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깊이 믿고 있는 거짓말을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회복될 수 있다.

<용서>

이라크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컨프런스를 가졌다. 375년에 모이고 그후로는 모이지 않았으니 1600여년 만에 모인 회합이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였다. (Dan Sneed)는 강사로 초대되었다. 미국인으로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갈지말지를 망설였다. 자녀들은 반대하였으나 아내는 가기를 원했다. 결국은 가기로 결정했다. 350여명의 기독교지도자들에게 내가 말할 주제는 용서였다. 용서라는 주제로 그들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가족이 살해를 당하거나, 강간을 당했거나,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용서를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수영선수였던 아들이 살해당한 경험을 말하였다. 아들이 살해 당한 후 나는 견딜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그 슬픔과 분노를 다스리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아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아들을 살해한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법정에서 판사가 살해당한 아들의 부모로써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판사에게 아들을 살해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판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이 이야기를 350명의 지도자들에게 했다. 그들은 삼사십 분동안 절규하며 울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우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절규를 평생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절규하며 아파한 후 말했다. 가해자들을 용서한다고. 그리고 그들은 서로 위로하며 기뻐하였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것도 되지만 나를 위한 것도 된다. 내가 용서할 때 나 자신이 풀린다용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선택하는 것이다. 용서하면 우리 자신이 그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용서는 당신이 자유케 되는 길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믿을 수 없는 선물이다. 용서는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것이다. 용서하면 그 사람을 다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용서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은 다르다. 신뢰는 얻어지는 것이다. 용서는 다시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한다고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보복하고 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은 그들이 한 것이 옳은 것이도 아니다. 하지만 용서는 자신을 자유케 한다.

자아상을 형성하는 것들: 1 (Inage Shapers: Part 1)

자아상을 만드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정체성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고 자아상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인가이다. 우리는 자아상의 그림을 가지고 그림대로 살아간다.

자아상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중요한 요소들

1)   부모님의 영향과 부모님과의 관계

마음 가운데 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참 중요하다. 5살 때 이미 부모님과 관계에 대한 이미지가 다 형성된다. 5살이 될 때 이미 그것이 형성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5살까지 함께 있던 부모님이 우리의 자화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좋은 부모가 되는 것, 성숙한 부모가 되는 건 참으로 중요하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  어떤 상처가 있던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중요하다.

 

2)   인생의 경험들

-우리의 정서적 삶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기로 선택한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생각하는 방식이 우리를 감정적으로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모든 인간 정신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과 그들안에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정서적인 고통에 의한 것이다.

(공경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공경한다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상처들을 묻어버리기가 쉽다. 문제는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나중에는 감정적, 정서적인 갈등과 문제가 된다. 상처를 내어 놓고 직면하고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 가가 중요하다.-이것이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수치심은 언제나 감추라고 말한다. 내가 그것을 노출하면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고 내면에서 이야기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된다. 내면에 묻어버리면 정신적인 병이 된다. 스캇 팩은 이것이 모든 정신병의 근원이 된다고 말했다. 수치스러운 것은 내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정직하게 잘못된 것을 내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이 내 안에 있는 독을 끄집어 내려는 것이면 그것은 존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경하는 것이다. 요한복음15장에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말하시면서 너희가 말은 공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공경에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부모님을 공경하기를 원하면 꺠끗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    삶의 경험은 두 가지 다른 일로 온다. 한 가지는 내게 들려진 말이다.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There is one who speaks rashly like the piercing of a sword, but the tongue of the wise heals.)

   

     말이 능력이 있다. 말이 우리의 삶 가운데 큰 영향이 될 수 있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습관을 가지지 말라. 잘못한 말이라도 실수로 한 말이라도 그것은 내 삶에 영향에 미친다. “너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니?”라는 실수로 한 할머니의 말이 오랫동안 삶 가운데 영향을 미쳤다. 말은 그렇게 영향력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람들의 삶을 가두어 버린다. 우리가 분노에 있을 때 그런 말을 하기 쉽다. 말은 생명과 죽음의 권세가 있다고 잠언에 말씀하신다.

 

    일곱 살 무렵이었다. 우리는 또래 친구들과 모여 다른 사람을 흉보는 말을 하였다. 그 또래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이야기를 한들 얼마나 나쁘게 이야기했겠는가. 하지만 할머니는 우리를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베개를 틑으셨다. 베개에서 깃털이 나와 바람에 날려갔다. 마당과 담장, 나무 등으로 흩어졌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깃털을 주워오라고 하셨다.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었다. 우리는 할머니에게로 가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한 말도 이 깃털과 같다.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이다.”

 

-     다른 한가지는 상황의 능력(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사건의 힘)이다. 말과 상황은 종종 같이 일어나기도 한다. 잠언 15: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언 17 20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나는 큰딸 지혜에게 두 번의 실수를 했다. 교회에서 아이가 넘어졌을 떄이고 다른 하나는 딸이 도로로 뛰어가려 할 때 매를 댄 것이다.

 

상황에서 우리는 메시지를 잡게 된다. 나(이택희)의 경우 어린시절 자전거 사고의 경험이 예가 되겠다. 재호와 내가 탔던 두 대의 자전거는 서로 부딛혀 완전히 망가졌었다. 휠이 휘어져 납작해졌다. 나는 일어나려해도 일어날 수 없었다. 절둑거리며 겨우 일어서자 주위 사람들이 다리를 한번 걷어보라고 하였다. 걷어보니 살점이 찢어져 정갱이 뼈가 다 보일 정도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혼이 날 걱정에 아픈 것은 뒷전이고 부서진 자전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 밖에 없었다. 부랴부랴 부모님이 달려오셨고 동네 의사(당시 그 의사는 면허가 없이 집에서 환자를 돌보았다)에게로 업혀갔다. 집에서 진료를 하였는데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덜너덜해진 살점을 꿰메었다. 저녁에 머리 맡에서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두 분은 내가 자는 줄로 알았지만 사실은 자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 녀석 참을성도 많고 대단한 녀석이다."라고 어머님께 말씀하셨다. 마취도 하지 않고 열서너 바늘이나 꿰메면서 울지도 않고 차분히 치료받는 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자전거 망가져서 아깝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참을성, 인내를 칭찬해 주신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단하다고 인정하는 아버지의 인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아픈 사건이었지만 내겐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최근 카톨릭 의대 교수로 있는 재호를 이십여년 만에 다시 만났다. 서로 가정을 이루고 부부가 함께 만난 건 처음이었다. 재호는 내게 그때 일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친 다리를 한 번 보자고 하였다. 사양하자 억지로 바지를 끌어올려 상처를 보려하였다. 친구도 그 상황이 머리속에 남아 육십 평생을 함께 해 온 것이다.

 

상황이 내 이야기의 전체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의 삶 전체를 좌우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실패는 한번 일어났던 작은 사건 작은 부분일 뿐이다.

 

로마서 8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빌립보서 3 13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그리스어 잊어버린다는 말(forgetting)은 안 일어난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묶였던 것을 풀어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 컨트롤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에너지를 푯대를 향해 나가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바울의 이야기는 과거의 것을 해결하라는 뜻이다.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이 가정해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풀어서 보내라는 뜻이다. 과거의 것들에 대해 잡고 있지말라. 그것을 직면하라. 해결하라. 그 경험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라이언 킹에 예언적인 말이 나온다. 아버지 왕이 죽고 심바(어린 사자)가 왕이 되는 순간이 나온다. 심바는 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간다.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 연못가에서 한 장면이 나온다. 물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반영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다. “너가 누구인지를 잊지 말아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너는 너가 지금까지 되어진 존재보다 휠씬 더 큰 자이다.” 너는 네가 지금까지 배워오고 알아온 것보다 훨씬 더 큰 자이다.

 심바에게는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요구가 있었다. 심바에게는 왕이 되어야 하는 의무, 길이 있었다. 하나님이 이 뮤지컬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너는 네가 되어진 것보다 휠씬 더 큰 사람이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너보다 훨씬 더 큰 자이다."라는 것이다. 이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지기를 원한다. 과거가 우리를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너는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휠씬 큰 자이다.” “너가 되어진 현재의 존재보다 휠씬 더 큰자이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하시도록 기대하모 노력하자.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다.

 

3)   실제적이지 않은 기준들 (비현실적인 기준들- Unrealistic Standards)

 

인정받으려하는 생각이 있다면 비현실적인 기준들이 문제가 된다. 내가 어떤 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자기 이미지는 너무 자주 기억을 통해서 측정된 과거 행동에 대한 평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격을 과거의 개인적 낙담(실망)위에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납받기를 원하는 욕망은 음식에 대해 느끼는 충동과 같다. 굶으면 무슨일이든 한다 그렇듯이 용납받지 못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범인의 동기는 인정받지 못한 불만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부모들은 종종 아이들을 용납받지 못하는 것으로 훈련하려 하지만 그것은 좋지 않다. 어느 기준에 이르지 못하면 용납받지 못한다는 이미지를 계속 준다.

성취함정: 용납받기 위해 나는 뭔가를 공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용납받겠다는 것이 문제이다. 갱단이 생긴 가장 큰 이유는 용납받기 위한 것이다. 갱에서는 소속감을 가지게 된다. 갱에서 자신의 행동들은 용납받기 때문이다. 길에서 몸을 파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에 참여한 적이있다. 그들과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어떻게 그 함정에 빠졌는가를 들어보면 그 이유는 용납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사랑과 용납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어떻게 용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몸을 팔고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용납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용납에의 근거들>

 

골로새서 1:21-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로마서 5:8-11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배소서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다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더 가까와지게 혹은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적으로 사랑하신다.

 

<당신의 유익을 위해 실패를 직면하고 사용하는 방법 (How to face failure and use it to your advantage)>

(가)실패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야라고 결정하자.(Decide that failure is not fatal)

(나) 정직하게 패배에 직면하고 성공한 척하지 말자.(Honestly face defeat, naver fake success)

(다) 실패를 사용하자.(Exploit the failure) 낭비하지 말자.(Don’t waste it). 실패를 통하여 가능한한 모든 것을 배우자.(Learn all you can from it)

(라) 실패를 다시 시도하지 않겠다는 변명으로 사용하지 말자.(Naver use failure as an excuse for not trying again) 실패를 통하여 배운 것은 없는가? 사례를 나눌 것은 없는가? 글로 옮길 것은 없는가?(이택희의 생각)

 

·         두려움을 직면하라. 직면하면 두려움은 큰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금새 알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4 7절 말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두려움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서 하시게 하라. 직면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에 성과가 좋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말라. 자꾸만 하다보면 그것이 당신의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성취감을 느낀다면 반드시 성과가 있고 진귀한 보화를 캘 수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참 좋은 나, The power of new identity’를 쓸 때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영어 문법이 완벽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읽고 쓰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런던의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계속 책을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그러나 하지 않았고 교회에서 젊은 여인이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출판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 아버지가 책을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쓰면 출판해 주겠다고 했다. 결국은 쓰게 되었다. 나중에 출판사 편집장이 말했다. "댄, 당신이 쓴 원고보다 더 잘 쓴 원고는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못쓴다고 했지만 출판사의 편집장은 가장 잘 쓴 원고라고 하였다. 어린 시절의 나쁜 경험이나 필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의 꿈이 사라지게 하지 말라. 

  "어떻게 내 삶의 꿈을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 안에 있는 깊은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깊은 욕망, 깊은 소망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속 깊은 곳에 소원을 주시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탤런트를 주셨다고 믿는다. 이것들을 주님 앞으로 가져나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기도해 보라.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있는 소원이 우리 속에 있는 꿈이고 비전임을 믿는다. 꿈을 발견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성령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위해 기도하고 찾으라. 그러면 찾게 될 것이다.

  <지혜롭지 않은 비교(Unwise Comparisons)>

 경쟁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통해서 내 존재가치를 경쟁과 비교하게 된다.

 우리는 매우 경쟁적인 문화에 살고 있다. 경쟁이 좋을 수도 있다. 스포츠나 자유 시장경제 등이 그렇다. 경쟁이 없는 체계에서는 가격이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가치를 서로 비교하면서 경쟁하는데 있다. 당신이 나보다 더 경쟁적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갈등과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그래서 경쟁은 가치가 있지만 파괴적일 수 있다.

 지혜롭지 못한 비교의 결과는

가)부당한, 부적합한 느낌이 생기게 된다. 뛰어난 사람과 비교하여 내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불공평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왜 나는 돈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고 나는 그렇지 못한가. 왜 나는 못생겼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생겼단 말인가. 경쟁을 자기의 개인적인 가치와 연관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서 사회는 광고 등을 통해 계속 좋은 차를 가지는 것이, 좋은 옷을 입는 것이, 좋은 시계를 차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우리는 종종 화를 내게 되는 데 불공평하다고 생각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가 불공평하게 취급당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들어온다.

다)분노가 생기기도 한다. 분노는 상처를 긁고 다시 긁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라)경쟁의 영이 임하게 한다. 나는 너만큼 잘해야 한다. 네가 가진 것을 나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문제이다. 나는 포드차를 탈 수 있는 형편이지만 내가 벤츠를 타야한다는 생각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내가 벤츠를 타야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경쟁을 하는 것이다. 나는 너 만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의 문제는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원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다보면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다.

  

   아들이 살해당했을 때가 10월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들 덕(이름)이 없는 것에 대해 보충하려고 다른 자녀들이 무척 노력했다. 하지만 누구도 덕의 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 자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다른 자녀들이 덕의 자리를 메울 수 없듯이.

   

   동양문화는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서양문화는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을 가운데 두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 있다. 공동체적 문화에서는 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들 각자가 중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처할 수 있는 나만의 자리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지 깨달을수록 더욱 자유롭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줄 수 있게 된다. 테레사 수녀가 노벨상을 타고 난 후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었는데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놀라운 것이었다. 기자가 "수녀님은 특정한 사람들을 돌보았을 뿐이지 많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은 것이 실망스럽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테레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니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사람이 세는 것처럼 세지 않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이 세는 것처럼 셉니다. 모든 사람이 독특한 존재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확신할 수 있는 건 당신은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당신만이 그분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사람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최고의 실패작이 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다윗의 특성은 왕이 된 후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윗이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의 양을 돌보면서 이미 많은 시를 썼었다. 아버지의 양을 돌보는 목동이었다. 왕이 되었을 때 이미 다윗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왕이 되었을 때 드러나게 된 것이다.

댄 스니드의 딸은 성품이나 가치에 대한 글을 쓰기를 좋아했다. 지금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목사이고 아이들을 위한 묵상책을 쓰고 있다. 하나님이 딸 안에 깊이 주신 소원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었고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똑 같은 것들이 우리들 안에도 있다. 우리도 마음의 소원을 찾자.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에게 어떤 열정이 있는가. 은사가 열정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더 가치가 있는 사람과 같이 되려고 시간을 쓰지 말라. 너 자신이 되어라.

 

<지혜롭지 않은 비교를 다루는 하나님의 가르침>

 

고린도 후서 10 12절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시편 139 13-18

당신이 나를 정말 잘 만드셨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저를 잘 만드셨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같이 되려고 낭비하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이 되고자 기대하는 그 사람이 되라. 거게에 당신의 성취가 성공이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당신이 가장 잘 살은 사람이 될 것이다.

 

4)   자신에게 하는 말

 자기에게 하는 말-우리는 자신과 항상 대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말해주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항상 듣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에게 대답하고 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은 그 어떤 대화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는 정말 중요한 일이다. (배윤주씨의 예)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화는 자신과 하는 대화이다.

 

대부분의 우리의 불행과 정서적 갈등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짓말 때문에 생긴다. Most of our unhaooiness and emotional struggles are caused by the lies we tell ourselves. Dr. Chirs Thurman-The Lies We Believe.”

 

당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자신이 자신의 가장 큰 적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보다 나 자신이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이것을 하고 있다.

 

<어떻게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좋겠는가>

 

자신과 대화하기를 도전합니다.(Challenge your self-talk)

1)무엇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말하십시오.-평가하거나 과장하지 말고 사실만을 말하십시오.(State precisely what happened-don’t evaluate or exaggerate, just state the facts)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하기로 했었다. 다가 가는 순간 그들은 흩어졌다. 그리고 갈 길로 갔다.

 2)당신이 내린 결론에 도전하십시오.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 결론을 내렸습니까? 다른 가능한 결론이 있습니까? (Challenge your conclusion: what grounds do you have to come to it? Are there any other conclusion?)

 

<자신과의 대화를 다루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

 

필립보서 4 8절 말씀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이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 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므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던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좋은 말을 하라. 덕을 끼치는 말을 하라.

 우리 모두는 가면을 쓰고 산다. 교회 가면, 직장 가면, 가정 가면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은 어떤가?  대개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잘 보이게 할 수 있는 가면을 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많은 다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예수님은 가면을 바로 벗겨내려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안전하게 느껴질 때 가면을 벗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가면을 벗게 만드신다. 마스크가 아닌 내면이 중요하지 않을까? 실제 모습과 가면 속의 모습이 같아야하지 않을까?

 두 장소가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이다. 교회와 가정이 안전하게 느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곳이 참 바일런스한 곳-어뷰즈가 많은 곳이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쉽게 분류하고 그 속에 가두어 버린다. 정직해야 할 장소가 정직하지 못한 장소가 되어간다. 우리가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가면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한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벗게 하려면 내가 먼저 가면을 벗어버려야 한다.

가장 진실되게 자신을 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영적 지도자일지도 모른다. 진실되게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신을 안전하게 내려놓고 솔직한 자리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와서 안전하게 느끼는 사람이 되면 좋지 않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내려 놓고 싶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모험을 하면서 나를 내려놓을 때 성령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신다. 진짜가 되자.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함께 진짜가 되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지도자들이 그래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친밀감에 대한 깊은 요구가 있다.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받기를 원하는 희망과 요구, 욕구가 있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자. 하나님께는 정직하게 하시는 방식이 있다. 정직함과 동시에 용납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예수님의 삶을 볼 때 나는 안전하구나라고 느낀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게 느끼기를 원한다.   

베드로를 좋아한다. 베드로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가 진짜로 느껴진다. 예수님을 세 번 배신하는 등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용하셨다면 나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다. 우리는 때로 실수한 것, 실패한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리더십의 목적은 사람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신다면 나도 사용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것을 가르치기를 원한다.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필요하다. 내가 사람들에게 소망의 도구가 되기를 원한다. 가면을 벗어버리고 나를 그대로 드러내므로써 성령님이 주변 사람들을 깊이 만질 수 있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강의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스스로 보는 것을 어떻게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를 실제적으로 적용하게 쉽게 설명하겠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사실이다. 우리들 각자는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자아상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규정된다. 결정된다.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보는 그림이 나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 자신이 나를 보는 것과 하나님꼐서 나를 보시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귀한 존재로 가능성으로 가득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첫째: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헌신하자.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를 생각할 때 하나님꼐서 내 삶에 가지고 계신 목적을 살아드려야 한다. 골로새서 1 16절의 말씀이다. 당신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졌다. 당신이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삶은 전혀 의미가 없다. 로마서 12 3절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이해하는 길 밖에 없다. 우리의 가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이 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가치가 있다. 내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에 의해 우리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를 너무도 존귀한 존재로,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고 하나님이 내안에 어떤 꿈을 두셨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예수님과의 접목되어 자라나야 한다.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며, 그분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예배소서 1 11절 말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를 위해 사는 지를 아는 것이다. 자라나는 관계 성장하는 관계에 헌신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에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내 생각 가운데 들어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더 은총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내 삶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8 31-32절 말씀 진리의 말씀에 거하면 너희가 내 자녀가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되리라. 말씀의 학생이 되자. 그러면 들리는 거짓말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계속 싸우는 것은 큰 갈등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 가운데 채울 때 거짓말들을 쫓아 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걸린다.

넷째: 성령님이 역사하심에 헌신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고 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로 만든다.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님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빌립보서 1 6절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이 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이루실 것이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신다. 교회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라고, 성령님이 예수님 같이 변화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행하게 하신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내가 계속하는 일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다섯째: 내가 올바른 생각을 하기로 헌신하는 것이다. 잠언 4 23너희 생각이 너희의 삶을 이루고 있다.” 생각이 우리의 삶을 이루어 간다. 생각을 통해 유혹을 받을 때는 있다. 어디에 거하는가는 유혹받는 것과는 다르다. 생각 가운데 머무는 것은 유혹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올바른 생각을 하기로 작정해야 한다. 진리를 생각하며 거짓을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싸울 만한 전쟁이다. 우리의 생각을 진리로 가득하게 해야한다. 거짓말이 아닌 진리 가운데 거해야 한다.

여섯째: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는 생활 태도나 습관이 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과거라는 감옥에 갖히게 하는 것이다. 어제의 실수라는 감옥에 갖히지 말자.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갖히게 된다. 용서는 우리가 하는 선택이다. 감정이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건과 연결된 감정이 있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질 떄까지 기다리지 말자. 용서할 때 나는 감옥에 갖힌 자를 풀어주게 되는데 그 감옥에 갖힌 자가 나 임을 알게 된다. 용서는 놀라운 것이다. 용서할 때 나 자신이 용서받다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 쓰레기들도 다 빠져나간다.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감옥 속에 갖혀 있는 것이다. 용서 없이 내 자신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지 말자.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에 대해 항거하는 것이다.

일곱째: 예배하기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배할 때 창조적인 것들이 일어난다.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갖히지 말자. 그 뒤에 있는 것을 보자. 사실은 내가 예배하면서 변해 간다. 요한복음 4 23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이있다. 예배는 영이 진리를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정직하게 그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

여덟째: 다른 사람의 삶에 투자하기로 헌신하는 것이다. (servant)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일에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종(servant)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 나 자신을 투자할 수록 내가 성공하게 된다. (servant)은 자기의 삶을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하여 드려지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드리자. 자신을 다른 사람의 삶에 투자하자. 자아상은 나 자신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기분이 좋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 좋아하신다. 옳은 자아상을 가지는 것의 목적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잘 알아서 나를 다른 사람을 위해 주는 것이다. 베드로 전서 410절 하나님은 각자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서로 돕기 위해 조심해서 그것을 사용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많은 좋은 축복들을 흘려보내면서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기 위한 것이다.

목사님의 마지막 기도: 하나님이 당신이 형성하셨을때의 생각만큼이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제목 나눔>

새로운 책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블로그를 새로 만드는 일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명철을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주 강사 댄 스니드 목사님)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는 사람,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가정,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사역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통역 허령 자매님)

 

<Love feast 참가자 나눔>

“4년전 큰 일을 겪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 죽이고 싶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2년동안 마음이 무거웠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용서하려고 애써도 용서할 수 없었다. 영적으로 고갈되어갔다. 기도가 되지 않았다. 아들을 살해한 가해자를 용서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을 받았다. 용서한다는 건 용납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닫았다. 잘 안되지만 용서하려 노력하겠다. 아니 용서하겠다. 댄 스니드 목사님의 기도가 큰 힘이 되었다.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판사 앞에서 아들을 살해한 가해자를 용서한다고 선언한 그는 성자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님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용서하지 못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트레이닝 캠프 참가자 간증 증에서-

열등감 속에서 살았다. 열등감 때문에 남보다 더 잘하려 노력했다. 아무리 잘해도 열등감에 시달렸다. 늘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마음 가운데 있었다. 열등감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더 친절하려 노력했다. 열등감이 평생을 따라 다녔다. 자녀가 좋은 상을 받았음에도 더 큰 상을 받지그랬냐고 이야기 했다. 아이는 어떻게 이보다 더 잘하라고 하느냐며 의아해 했다. 무심코 나왔던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자랄 때 엄마가 내게 해준 말 때문이었다. “너는 예쁘지도 않으니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신 그 말 때문이었다. 내 자녀에게 무심코 했던 말도 어릴 때 엄마에게서 들은 그 말이  각인되었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사실이 아닌 말이, 견고한 진이 내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여 나를 열등감으로 몰고갔던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앞으로 나는 자유로워 질 것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할 것이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함, 열등감을 이용하여 나를 성장케하셨다는 점이다. 나는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더 노력했고 더 열심히 살았다. 문제는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점이다. 더 이상 열등감으로 힘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트레이닝 캠프 참가자 간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