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信義)
이 택 희
유니폼을 만드는 일을 주로 하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략 삼십 명. 이태리, 우크라이나, 중국 등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었다. 공장에서 일하여 번 돈으로 아파트 월세도 내고 식료품도 샀다. 이들에게 주급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토론토의 본제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지 않고 중국에서 만들어 납품하면 원가가 적게 먹혔다. 당연히 이윤도 훨씬 많아졌다. 인건비등 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아 원가가 더 들고 따라서 이윤이 적어도 사장은 늘 토론토 공장에서 생산하여 납품하는 쪽을 택했다. 2주일마다 한번 씩 받아가는 주급이 직원들에게는 생명줄과 같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중국에서 수입하여 납품을 하게 되면 상당수의 일자리를 줄여야 했다.
사장은 공장에서 일하는 전 종업원을 식당으로 초대하여 식사도 대접했고 크리스마스엔 정성껏 선물을 준비하여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꼭 껴안아도 주었다. 월급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였지만 사장은 일일이 고마움을 표시했다. 휴가를 갈 때면 주급과 함께 휴가비로 쓰라고 얼마의 돈을 봉투에 넣어 주기도 했다.
일자리를 만들어 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인데 직원들을 일일이 챙겨주는 이런 고용주는 많지 않다. 공장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이런 사장의 따뜻한 마음을 고마워했다. 고마운 마음의 표현으로 휴가에서 돌아올 땐 사장께 드릴 작은 선물이라도 꼭 챙겨오곤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 사람도 몇 사람 있었다. 사장이 한국인이라 이들 한국인 종업원들에게는 특별히 더 잘해주는 편이지만 돌아오는 건 실망감밖에 없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어도 고마운 줄 몰라 했고 휴가비를 주어도 어느 한 사람 작은 선가이라도 사오는 경우도 없었다.
일이 밀려들어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을지라도 다른 곳에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준다고 하면 곧바로 옮겨갔다. 한두 주일만 더 일하고 옮겨가라고 사정을 해도 매몰차게 뿌리치고 다른 직장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돈을 더 준다고 옮겨간 공장이 문을 닫거나 일이 없어지면 다시 돌아와 일자리를 달라고 살랑거리는 사람 또한 한국출신이었다.
다른 민족출신의 종업원들은 자기들만 아는 이런 한국인들의 심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신의도 없이 그럴 수 있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들은 돈을 더 준다고 해도 다른 혜택을 더 준다고 해도 몇 년째 다니고 있는 공장을 쉽게 옮겨가지 않았다. 신의를 더 중시 한 것이다.
사장은 종업원들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주문이 너무 많이 밀리어 납품일자를 맞추기 어려운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에서 물건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자제했다.
한국에서 화공약품을 수입하여 캐나다에 있는 제철공장에 납품하려는 노력을 했다. 공장 측에서는 기존에 쓰고 있는 물건이 나쁘지 않다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거듭된 노력 끝에 테스트로 두 드럼의 약품을 놓고 가라고하는 대답을 들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어 애를 태웠다. 이번에도 연락이 없을라나 보다고 포기하던 차에 전화가 왔다. 테스트로 써본 두 드럼의 약품이 나쁘지 않았으니 다음에는 네 드럼을 놓고 갔으면 좋겠다고.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약속한 날짜에 네 드럼의 약품을 배달하였다. 네 드럼을 써 보아도 가격과 품질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공장 측은 기존의 쓰던 물건이 모자라거나 배달이 늦어질 땐 새로운 약품을 병행하여 쓰기 시작했다. 납품하는 약품 품질이 믿을만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장이 믿음직스럽다고 판단하자 공장 측은 주문을 계속 늘였다. 주문이 늘어나도 제품의 단가를 높이는 일도 없었다. 공장에서는 본사뿐만 아니라 계열사의 여러 공장에도 자기들이 쓰는 물건을 쓰도록 권유했다.
약품을 납품하는 사장은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더 큰 저장창고를 준비하고 더 많은 물건을 수입하였다. 사람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사장은 믿을 만한 한국인 한사람을 고용했다. 성실하게 일하는 그가 믿음이 갔다. 그에게 더 많은 급여와 혜택을 주었다. 나중에 후계자로 키우겠다는 마음도 먹었다.
어느 날 납품 하는 제철공장 측으로부터 두툼한 우편물 한통이 사장 앞으로 날아왔다. 편지엔 이런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귀사의 직원이 자기가 한국으로부터 동일한 물건을 더 낮은 가격으로 납품하겠다고 하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동봉하는 우편물 속엔 그동안 믿었던 직원이 제철공장으로 보낸 각종 제안과 편지들이 들어있었다.
캐나다에서는 한번 관계를 맺으면 쉽게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있다. 물건 값이 좀 비싸더라도 계속 공급을 받는다. 신의를 그만큼 중시하는 것이다.
물건 값이 좀 싸다고 거래처를 바꾸다보면 일이 년은 좀 싸게 납품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가격을 올려달라고 하고 올려주지 않으면 납품을 지연하는 등 횡포를 부린다. 이런 일을 당하는 건 한두 번으로 족하지 계속 그런 일을 당하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은 이익을 따라다니며 신의를 헌신짝처럼 쉽게 져 버리는 삶을 살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본다. 어떤 것이 더 소중한 가치인지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절바른 사람,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다. 최소한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 특별한 일로 여겨지니 이 무슨 조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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