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rifice·시니어

딸에게 보내는 편지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1. 9. 20. 02:53

  사랑하는 딸 지혜에게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지혜에게 기도로 또 온 마음으로 성원을 보낸다몸은 멀어져 있지만 매일 기도 중에 딸을 만나고 있단다. 운전할 때나 글을 쓸 때나 책을 읽을 때나 늘 딸을 생각하고 응원하고 있지. 개인적으로 텔레파시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면 텔레파시가 통하여 딸이 힘을 얻게 되리라 확신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영역이기도 하겠지.

지혜는 세계 20위권 대학인 시드니 대학의 의과대학도 합격한 실력이니 거기서도 얼마든지 잘해내게 될 거야. 그리고 지혜는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될 거야. 하나님께서 지혜와 늘 함께 하시거든.

첫 시험에서 만점을 맞았으니 축하해. 딸도 이야기 했듯이 첫 시험은 3년 반에서 4년 의대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준거(어떤 기준 같은 것)가 되어질 것으로 믿어. 아빠도 그 소식 듣고 무척 기뻤다. 과연 우리 딸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축하해.

아빠는 요즈음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제일교포(일본에 있는 교포) 3세인 손정의씨의 글을 읽고 있어. 손정의씨는 아빠와 같은 나이인데 일본에서 소프트뱅크 라는 큰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지. 그가 미국 유학시절 공부했던 경험을 쓴 글이 감동을 주는구나. 딸과 함께 나누고 싶어 첨부하니 시간 있을 때 읽어보렴.

승리하는 한 주 보내게 되길 기도한다.

아빠가.

“1974년 초 드디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 57 8월 생인 나는 아직 만 16세였다. 홈스테이를 하며 6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았다. 그 해 여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세라몬테 고등학교 10학년으로 편입했다. 10학년은 한국 학제로 치면 고교 1학년에 해당한다.

 내 마음은 급했다. 정말 어렵게, 무리해서 추진한 유학이다. 어떻게든 빨리 대학에 가 치열하게 공부하고 싶었다. 일주일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10학년 교과서를 모조리 읽었다. 물론 다 이해한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영어 실력이 없었다. 하지만 핵심과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10학년 교과서를 다 봤습니다. 11학년 수업을 듣게 해주세요.”

 무리한 요구였다. 한데 선생님은 의외로 선선히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줬다. 11학년 교과서를 모두 구했다. 이어 사흘간 전체를 섭렵했다. 또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11학년도 됐어요. 12학년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3일 뒤, 교장선생님께 선언했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겠습니다.”

 이번엔 선생님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해 봐라고 했다. 속으론 아마 합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어쨌거나 나는 얼마 뒤 검정시험을 치러 갔다. 눈앞이 캄캄했다. 문제의 양, 해독해야 할 문장이 너무 많았다. 손을 번쩍 들고 감독관에게 말했다.

 “전 일본에서 왔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요.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학업 수준을 테스트하려는 것 아닙니까. 일영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공정합니다.”

 감독관은 한마디로 딱 잘라안 된다고 했다.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겐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갔던 감독관이 돌아와 말했다.

 “ 교육청 허락을 받았으니 사전을 써도 좋다.”

 원래 시험은 오후 5시에 끝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손을 들었다.

 “사전을 찾아야 해 시간이 배로 필요합니다. 종료 시간을 늦춰주십시오.”

 이번에도 감독관이 졌다. 나는 자정까지 시험을 쳤다. 그리고 합격했다. 미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고교과정을 마친 것이다.

# 19, 인생 50년 계획을 세우다

하지만 바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도 나는 미국에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다. SAT 성적 없이도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한국의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홀리네임스 칼리지에 들어갔다. 2년 동안 전 과목 A학점을 받았다. 덕분에 77년 여름 드디어 UC버클리대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19. 나는 웅대한 그림을 그렸다. 이름하여손정의 인생 50년 계획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앞으로 50년 동안 내가 도전할 것들, 이뤄내야 할 것들에 대한 비전을 완성한 것이다. 이후 내 삶은 온전히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바쳐졌다. 계획을 바꾼 적도, 목표치를 낮춘 적도, 이를 달성하지 못한 적도 없다. ‘신중히 계획하되, 반드시 실행한다’. 이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원칙이다.

# 우연히 본 사진감격해 울었다

인텔의 1974년 작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 대학에 입학한 뒤엔 정말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업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항상 맨 앞줄에 앉아 교수 얼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화장실에 갈 때도 교과서를 손에 들고,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않았다. 왼손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움직이며 눈은 교과서에 못 밖은 채 아무 것이나 짚이는 대로 입에 넣었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두 눈으로 음식을 내려다보며 여유 있게 식사하는 사치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폐렴에 걸린 줄도 몰랐다. 기침이 계속 터져 나오고 목에선 쌕쌕 소리가 났지만 참고 공부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그저 책만 봤다. 쉬는 시간은 오직 잠 잘 때뿐. 그마저도 최소화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가 잘 안 된다, 돈이 없다, 그런 자기 위안 따위 허락할 수 없었다. 피 토하는 아버지, 오열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온 유학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왜 우는 소리를 낸단 말인가. 물론 일본에 있을 땐 나도 불평 많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그럴 수 없었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본업 중의 본업에 목숨을 걸자. 죽어라 공부하지 않으면 벌 받을 거야!’ 그런 각오로 나 자신을 몰아쳤다.

 그 무렵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충격적 사건을 접했다. ‘일렉트로닉스라는 과학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무슨 미래도시의 설계도 같은 컬러 사진이었다. ‘이게 뭐지? 희한하게 생겼네?’ 다음 페이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인텔이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기사를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온몸이 마구 저렸다. ‘인류가 드디어 이런 엄청난 일까지 해냈구나.’ 굉장한 감격을 느꼈다. 이 작은 부품 하나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갈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발명이다. 컴퓨터다. 그 길을 가겠다.’ 소프트뱅크 창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추신(덧붙임):1. 본한인교회 한석현 담임목사님꼐서 지혜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어.

             2. 할아버지는 최근 급격히 쇠약해 지셔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아빠는 10월 11일 한국에 들어가려고 비행기표를 끊었는데 일정을 좀 당겨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해 주렴.

             3. 할아버지께서는 지혜가 의대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기뻐하고 계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다고 말씀하시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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