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본 시니어 대학(Vaughan Senior College) 글쓰기 반 1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2. 7. 6. 23:39

  음악치료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음악을 통하여 아픈 부분을 치료하는 것이지요.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왔고 지금은 아주 일상화되어있는 분야입니다. 음악치료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글쓰기를 통하여도 치료가 가능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할 때 글을 쓰면 안정이 되고 치유가 일어나지요. 개인적으로도 글쓰기를 통하여 생각을 정리하고 만족과 보람을 찾는 경험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초 어떤 주말 침묵수련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 문득 시니어 대학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께 글쓰기 지도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께 기본적인 글쓰기 방법을 가르쳐 드리고 글을 쓰시도록 격려해 드리면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글쓰기를 통하여 삶을 정리할 수 있고 또 후손들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었지요.

선생님으로 정년 퇴임하신 인생의 선배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선배님은 퇴임 직후 수필 강좌 클래스에 들어오셨습니다. 함께 공부를 시작한 동료 중 가장 열심히 글을 쓰시고, 가장 열심히 강좌에 참여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참 감사해. 퇴직한 후 할 일이 없다고 적적해하며 집에만 있었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나는 교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지금부터 글쓰기 공부를 하라고 권하곤 해. 나이가 들어서 글쓰기를 하는 건 다른 어떤 취미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 같아.”

글쓰기 강좌를 시작한 후 참여하신 어르신들은 다소 어색해하시며 주저하셨습니다. 학창시절 글을 써 본 후 평생 글쓰기와는 담을 쌓고 사셨으니 그럴 만도 하시지요. 한 주일이 지나고 두 주일이 지나자 조금씩 삶을 풀어놓으셨습니다글쓰기에 대한 재미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오시도록 숙제를 내어 드렸는데 곧잘 해오셨습니다. 때로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하시며 노래교실이나 댄스 시간을 좀 줄이더라도 취미교실 시간을 늘려 글쓰기 공부 시간을 더 가지자고 떼를 쓰기도 하셨지요.

자신들이 쓰신 글을 읽으며 울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수업에 참여하신 다른 어르신 분들도 눈시울을 붉히곤 하셨지요. “나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해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 또한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삶 가운데 이런 부분도 있었구나.”하고 느끼는 듯하였습니다.

12주가량 진행된 시니어 대학 봄학기가 종강을 맞았습니다. 종강식이 있는 날 그동안 배우고 익힌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지요. 하모니카 반의 합주, 자신들이 만든 공예품 전시회, 수필 낭송 등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쓰인 글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어졌습니다. 수려한 문장은 아니나 삶이 그대로 녹아있어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하여 참여하신 어르신들이 무엇인가 이루어 내었다고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기에 보람을 느낍니다. 자녀에게 당신께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하시기에 지켜보는 사람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집니다.

몇 회에 걸쳐 어르신들께서 쓰신 글을 소개할까 합니다.

 

미안해 여보

고승만(89)

대개 사람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학문적으로 배운 것이나 경험이 많은 일을 택하게 된다.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이다. 학교에서는 광산학과를 졸업하고 일제 말에는 비금속 광산을 엄친(嚴親)과 같이하여 많은 재미를 봤다.

72년 어느 날 학교 동창으로부터 연락이 와 다음날 만났다. 친구가 평생 너하고 같이 사업하는 것이 소원인데 경기도 포천에 좋은 돌산이 있는데 같이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한다. 다음날 현장 답사를 갔다. 그리 크지 않는 산인데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조자(內助者)와 의논을 하니 펄쩍 뛰었다. 그럴 것이 광산을 해서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돌산은 눈으로 보고 큰 암석에서 뜯어내는 것이다. 판로(販路)만 개척하면 계산상으로 수지타산이 나오니 실패할 위험이 적다.”

때마침 모 무역회사와 연계하여 일본으로 수출하기로 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몇 달 만에 상품을 만들어 수출 준비를 하는데 73, 74년 에너지 파동이 심하였다. 일본도 그 영향을 크게 받아 수출길이 막혀버렸다. 그 외 따로 판로 개척이 쉽지 않아 사업은 고스란히 실패하고 말았다.

아아 옛날이여한숨만 터져 나왔다. 내조자가 반대한 사업에 실패하고 가산을 탕진하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린 사 남매와 내조자 걱정뿐이었다.   

그러자 내조자는 발 벗고 나서 장사를 시작하는데 이것은 장사가 아니었다. 머리에 물건을 이고 친지나 친구 집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다시피 하는 거였다. 물건을 팔아봤자 얼마 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계란장사도 했다.

이런 것을 보는 내 마음은 찢어졌다. 사람 잘못 만난 내조자가 불쌍해 보였다. 어린 자식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도 없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보기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많은 암루(暗淚)를 흘려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다가 직장에 취직하게 되어 겨우 체면치레는 하게 되었다. 내조자의 근면절약으로 형편이 좀 나아졌다. 아이들 학교도 잘 마쳐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 전에도 과거사는 다 잊을 수 있지만, 당신 고생시킨 건 잊을 수 없다.”고 하니 고맙다.”라며 씨익 웃었다.

영웅이 때를 잘 만나야 하듯이 사업도 때와 장소를 잘 만나야 하고 주변의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깊은 함정에 빠져 봐야 참 하늘이 보인다는 걸 실감한다.

 

울타리

  봉춘자(70세)

내가 처음 본 울타리는 1945년 해방을 맞던 4월 어느 날인 것 같다. 다섯 살 어린 소녀의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이사 온 곳은 외할아버지가 계신 신안진이란 곳이었다. 당시 어머님의 간질병 증세가 너무 심하여 어머님의 소원대로 외가동네로 이사 오게 되었다. 외할머니댁 집 벽을 사이에 둔 집에는 나와 동갑내기 옥금이가 살고 있었다.

집 주위로는 큰 울타리가 둘러싸여 있어 옥금이를 만나려면 불편하였다. 그래도 나와 옥금이는 어느 사이에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놀 곤하였는데 엄마 없는 옥금이는 웃음도 적고 조용했다.

그때 나는 아프신 엄마라도 우리 형제들을 돌보고 매일 함께 있어주시는 것에 감사했다. 

어느 날 버들로 엮어 만든 울타리 한쪽이 비스듬히 넘어져 있어서 그쪽 집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그 울타리는 도둑을 막기 위한 것보다 닭이나 개들이 채소밭을 못 쓰게 할까 봐 세워둔 울타리라고 하였다.

우리 집이 신안진으로 이사를 온 지 어느덧 두 달이 넘는 무더운 여름철이 되었다. 울타리 밑에 심어 놓은 꽃들이 누가 먼저 필세라 울긋불긋 꽃 몽우리를 틔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봉선화가 방긋방긋 웃으며 피어나고 접시꽃, 백일홍, 코스모스가 차례로 피었다. 앞마당 백양나무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아름다운 꽃들이 조화를 이루어 정원은 더욱 빛났다.

어느 무더운 저녁 해는 이미 서산을 넘어 보이지 않았으나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의 노을빛이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부르는 쪽으로 달려가며 기울어져 있는 울타리를 뛰어넘는데 정이 많고 부지런한 옥금이 언니가 넘어질라 조심해야지.” 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 언니는 옥금이와 내게 봉선화 물을 들여주려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 우리 둘은 얌전히 앉아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언니는 봉선화 꽃을 이겨서 우리의 손톱에 올려놓고 낡은 천 조각으로 잘 싸매면서 빠지면 안 돼 조심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이 떨어져 나올까 걱정이 되어 밤잠도 설치었다. 다음 날 아침 옥음이와 나는 빨갛게 물든 손톱이 하도 예뻐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옥금이도 웃음을 되찾았고 어머님의 병환도 좋아지셨다. 우리 집은 외가를 떠나 이사를 해야 했으므로 옥금이와 나는 이별을 맞게 되었다.

그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직장에 다니던 외삼촌께서 여름휴가 차 오셨는데 떠나던 날 편지 봉투를 주면서 옥금이 언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다. 아마도 그 편지는 연서가 아니었을까. 일 년이 지나 그들은 결혼하였고 옥금이 언니는 나의 외숙모가 되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옥금이도 결혼을 하여 남편을 따라갔으며 나도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이렇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 아이들도 결혼하고 나는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울타리 사이로 드나들던 내가 황혼 길에 들어섰고 황혼이 노을빛을 지나 어둠이 스며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주눅이 들지 않을 터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믿으며 이웃을 위해 작은 도움의 손길이라도 내미는 삶을 살리라 다짐해본다. 옥금이와 만나 지나간 어린 시절의 추억을 꽃피울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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