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문제투성이 세상입니다. 보험금을 타려고 가족을 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가 난다고 학교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폭탄 테러로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지진과 해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기꾼들이 활개를 치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빠들의 허리가 휘어집니다. 세상이 점점 나아져야 하는데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게 어떤 건지 혼란스럽습니다. 돈 십억이 주어진다면 감옥에 가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꿈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대학을 나와봐야 직장을 잡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공부하면 뭐하냐고 반문하며 자조(自嘲)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정치인들은 공약(公約) 아닌 공약(空約)을 남발하여 국민을 실망하게 하고 빈부의 격차는 커져만 갑니다. 중년의 가장은 자녀 교육과 혼사 등 쓰임새가 많은데 직장에서 강제로 나와야 하니 걱정입니다.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대로 중년은 중년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사는 게 녹록하지 않다고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가히 절망의 시대라 할 만합니다.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발이 날리지만, 땅속엔 이미 봄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죽은 듯 보이는 가지이지만 때가 되면 싹이 돋고 잎이 납니다.
어린 동생 둘과 함께 동그마니 세상에 남겨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1960년대 초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업이라고는 없을 때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우주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지요.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굶어 죽었다는 소문도 간간이 들려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여 사회에 밝은 빛을 비추고 일가(一家)를 이룬 분이 계십니다. 강영우 박사님이 그분입니다.
간밤에 어깨가 시리고 온몸이 욱신거렸습니다. 진통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일어나니 몸이 개운치 않고 가위눌린 듯했습니다. 마침 아내가 사다 놓은 커피가 있어 함께 나누며 서재에 앉았습니다. 친구가 빌려준. 강영우 박사님의 유작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를 집어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아내에게 남긴 편지 한 구절이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실의에 빠져있을 때 해준 한마디 말이 그렇게 고마웠다고, 표현을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꼭 말하고 싶다고. 강 박사께서 처한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한다면 그래도 지금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요? 그토록 어려운 시절을 살아냈으면서도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자녀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M 대학의 헬스 사이언스(Health Science) 학과에 입학해 공부하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Q 대학 헬스 사이언스 학과로부터 큰 금액의 장학금을 제시 받은 자녀도 있습니다. 이모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들어가 수술을 끝내고 회복 중인 자녀도 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는 의지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이 계시기에 세상은 조금씩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1964년 당시 젊은 강영우와 같은 청년들이 여럿입니다. 절망의 시대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가고 있습니다. 먼 훗날 그들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뿐인 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아니, 제 눈에는 희망만 보였습니다.”
강영우 박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아내와 자녀에게 남긴 편지를 올려놓습니다. 강영우 박사님의 유고집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는 좋은 친구 신홍기 전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나의 지팡이가 되어준 당신, “사랑합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당신에게 내민 이름 석 자. ‘석.은.옥’싸구려 반지 하나 끼어 주지 못한 프러포즈, 그리고 반지 대신 내민 그 이름 석 자를 너무 감사하게 받아주던 당신, 그런 당신과 부부의 인연으로 함께한 지도 벌써 40주년입니다.
앞으로 함께할 날이 엄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입니다. 시각 장애인과의 결혼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 준 당신이 고맙고, 이렇게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와 항상 같은 곳을 보면서 함께해 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나의 지팡이가 되어 나보다 항상 한 발짝 앞서 걸어주던 당신, 그런 당신에게 가장 고마웠을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진영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습니다. 한국 시각장애인 최초로 박사가 되어 금의환향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학생 비자는 만료가 되고,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도 중단되어 버리고, 어린 아이들은 둘이나 되고, 이런 현실 속에 주저앉아 버리려는 나를 당신이 위로했습니다.
세 살짜리 진석이의 손을 잡고, 갓난아기인 진영이를 품에 안고, 식료품점이라도 열어서 생계를 유지할 테니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열심히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라고 나를 격려해 주던 당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안도하셨는데, 절대로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거라고, 반드시 더 좋은 문을 열어 주실 거라고 당신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때 당신의 모습을, 신념에 가득 찬 당신의 목소리를, 나를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마음속으로만 하던 말을 이제야 글로 남깁니다.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습니까?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이들 키우고, 일을 하고, 가사를 돌보고, 바깥 일에 바쁜 나를 위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쓰던 당신. 매일 예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먹먹해집니다. 편안하게 앉아 식사하던 날보다 운전하며 끼니를 때우던 때가 더 많았던 당신. 당신은 나를 위해, 우리 가장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하기만 합니다.
마음보다 머리로 먼저 생각하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따뜻하게 품고 살아가는 당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집안의 따뜻한 심장으로 우리 모두를 감싸 안아준 당신의 사랑 속에서 나와 우리 두 아들이 지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나에게 가정을 선물해 준 당신,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 준 당신, 그리고 나를 늘 믿어 준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난 5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해 주시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나를 늘 자신을 이끄는 등대라 불러주던 당신, 그런 당신은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었습니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당신을 난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살게 한 내 아들들, “축복합니다”
이제 너희들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훌륭하게 자라준 나의 아들들을 난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안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오는구나.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한 추억이 내 마음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
진석아, 아버지는 고사리 손을 있는 힘껏 모으고 아버지의 눈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던 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꼭 안과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눈을 고쳐 주겠다고, 그 작은 가슴을 있는 힘껏 부풀리며 큰소리로 약속하던 너의 모습을 말이다. 항상 고집스럽게 네가 원하던 것을 위해 나아가던 모습이 난 자랑스러웠고,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하던 널 보며 난 뿌듯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고 늘 스스로에게 당당한 진정한 남자 진석이. 그런 네가 너를 믿지 못할 때도 난 항상 너를 믿었다. 그리고 지금도 믿고 있다.
진영아,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품고 사는 나의 작은아들. 항상 자신보다 남들을 먼저 생각하는 너의 모습이 걱정스러울 때도 있었단다. 그렇지만 당돌하게 세상에 맞서 네 방식대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너의 도전 정신이 난 정말 자랑스럽다. 나의 연설문을 네가 처음 교정해 주던 날을 기억하니? 내가 쓴 연설문을 손에 들고, 네가 연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너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니.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항상 좋은 파트너였다. 수십, 수백, 수천 명 앞에 홀로 서서 연설할 때도 내가 떨지 않았던 것은 나의 글 속에, 나의 말 속에 항상 네가 함께했기 때문이란다.
진석아, 진영아, 나의 말에 항상 귀 기울여 준 너희들이 난 고맙구나. “시도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해보기 전에는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너희들이 이제는 최고의 안과의사로, 최고의 법조인으로 더 좋은 세상과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이 아버지는 뿌듯함을 넘어선 감동을 느낀단다.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준 너희들. 아들과 함께 목욕하고, 뒹굴며 뛰노는 즐거움을 선물해 준 너희들. 손주들과의 오붓한 낮잠을 즐길 기회를 준 너희들을 주신 하나님께 난 정말 감사한다. 너희들 덕분에 난 복된 삶을 살았구나.
특히나 이번 크리스마스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선물이었단다. 눈먼 고아로 어린 동생 둘과 세상에 남겨졌던 나에게 지금과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나는 아마도 거짓말을 해도 좀 그럴듯하게 하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한 집에서 이민 1세대인 나와 내 동생들이, 그리고 2세대인 너희 둘과 나의 조카들이 각자의 배우자들과 함께 북적이고, 또 이민 3세대인 너희의 아이들이 뛰어놀며 온 집안을 웃음소리로 가득 채웠던 이번 크리스마스를 난 잊지 못할 것이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저절로 힘이 난다는 것이 이런 것임을 나는 그날 느꼈다. 내가 떠나더라도 진석이, 진영이 너희들이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저도 없단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이 늘 너희들과 함께하기를 하늘나라에서도 아버지는 믿고 계속 기도할 거란다. 나의 아들 진석이와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고,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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