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시인의 어머니 정재옥 권사님은 1931년 12월 6일 아버지 정상은 씨와 어머니 노영은 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하여 북경에서 유치원과 소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동덕여고를 다니셨다. 1953년 박두화 씨와 부산에서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셨다. 1976년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오셔서 조지 브라운 칼리지에서 Sewing과 Tailoring을 공부하였고 Tilley회사에 다녔다.
그 시절 북경에서 유치원과 소학교에 다니실 정도였으면 지주 집안의 따님이셨겠다. (성방 형(작고)의 어머님도 신의주 출신이신데 동경 유학에서 아버님을 만나 결혼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토요일(4월 8일) York Cemetery Funeral Center에서 있은 정재옥 권사님의 장례예배에 다녀왔다. 외손자 오동규 군의 조사(said in English)가 인상적이었다. “꽃이 피었다. 바람이 불 때 바람막이가 되어주었고 비가 올 때는 우산이 되어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추위를 녹여주는 화롯불이기도 했다. 그래서 꽃들이 예쁘게 자랄 수 있었다.” 자신들을 꽃에 비유하고 할머니를 바람막이, 우산, 화롯불로 비유하여 표현한 조사는 처음 듣는 듯하였다.
외할머니와 함께 만두를 만들던 추억을 이야기할 때도 재미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만드시는 만두는 참 맛있었다. 나는 만두를 잘 못 빚었지만, 할머니는 만두를 잘 빚으셨다. 함께 쪄 먹었었는데 할머니가 만든 예쁜 만두는 내가 먹었고 내가 만든 만두는 할머니가 드셨다.” 할머니와의 사랑을 표현하는 손주의 모습이 예뻤다. 이렇듯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요, 만두를 함께 빚는 것이요,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리라.
손녀 박지인 양도 조사를 하였는데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이 많지 않아 추억이 그리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 6개월가량 할머니 곁에 머물 수 있어 좋았다고 하였다. (내 아이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먹먹해졌다)
1982년 어머니 날 즈음이었던 모양이다. 정 여사의 딸 박지연(박성민 시인의 누이동생) 씨가 Korean Post에 글을 실었다. 딸은 까마득히 잊어버렸지만, 어머님은 신문을 잘 스크랩하여 지금까지 보관하셨다. 부모님은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에도 고마워하며 오래 기억하시나 보다. 박지연 씨가 1982년(당시 정 여사님의 연세 53세)에 기고한 글이다.
털 쉐타
박지연
“내가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가을이 되면 바빠지는 엄마의 손길이다. 어린 딸을 가진 엄마는 혼자서 김장준비를 하셨고 연탄을 쌓아 놓아야할 부엌을 치우는 일을 하셨고 그리고 또 뜨개질을 하셨다. 항상 딸아이의 옷을 먼저 짜셨다. 그리곤 오빠의 옷을 짜셨고 남동생은 오빠가 입던 옷을 입곤 했다. 그리고 짜다만 엄마의 옷은 뜨개질 바구니 속에서 대바늘이 끼우진 채 겨울을 지내곤 했다.
엄마가 밤늦게까지 짠 옷을 입고 학교 가는 날은 같은 동네 살았던 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엄마가 해 주셨구나. 참 좋겠구나. 엄마가 항상 예쁜 옷을 해 주시니…” 선생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땅 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별로 싫지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조그만 딸아이가 커가는 만큼 엄마는 뜨개질을 좀 더 많이 하셔야 했다. 그런 엄마의 가슴에는 일 년에 한번인 어머니날이 되면 학교에서 만들다 잘못된 종이 카네이션이 가슴에 달리곤 했다. 그것은 하나의 구겨진 종이 뭉치였지만 얼마동안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엄마 옷에 달려 있곤 했다. 어머니날이 되면 종이 카네이션이나 만들던 아이가 교복을 입고 빨간 카네이션을 사면서부터는 “엄마! 이거 월요일까지 내야해요.” 하면서 조금 짜다만 옷을 엄마한테 주든지 아니면 빈 공간이 많은 수틀을 내밀곤 했다. “다음번에는 내가 할게, 요번만…”하던 딸아이가 교복을 벗고 캐나다로 이민 오게 되자 엄마의 뜨개질은 한동안 멈추었다.
이제 엄마만큼 자란 딸아이는 어머니 날이 되면 엄마가 나보다 약간 크시고 뚱뚱하시니깐 하면서 옷가게에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앞뒤를 살펴보곤 옷을 산다. 하지만 엄마에게 맞으리라고 생각하고 산 옷들은 “이거 엄마거야”하면서 엄마 손에 쥐어주는 순간부터 딸아이의 옷이 되고 만다.
그런 딸을 가진 엄마는 얼마 전에 오랫동안 벼르시던 털 쉐타를 짜기 시작하셨다. 큼직하게 짜셔서 입고 다니신다면서… 정말 오랜만에 끝이 난 쉐타는 엄마가 입기에는 작았다. 쉐타를 입고 거울 앞에 서있는 딸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너한테 맞구나”하면서 옷 매무새를 고쳐주셨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오느새 엄마만큼 커버린 딸아이지만 엄마한테는 아직도 밤새 털 쉐타를 짜 업혔던 때의 조그만 딸아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한 코 두 코 손을 임직일 때마다 엄마는 어쩌면 그런 딸아이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가 짜는 쉐터는 한 코 두코씩 작아져서는 딸아이 크기만 한 옷이 되어지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거울 속에 비추는 엄마의 모습과 딸아이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 어머니 날에는 엄마의 몸에 맞는 큼직한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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