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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의 유랑기(이몽옥)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8. 8. 10. 23:23

 본 시니어 대학 글쓰기 반에 출석하시는 이몽옥 선생님께서 자신이 쓰신 글을 73주년 광복절 기념 문예작품 공모전에 보내 달라고 부탁하셨다. 마감일에 맞추어 보내드렸는데 주관하는 애국지사기념사업회에서 입상하였다는 소식을 전해오셨다. 애제자 중 한 분이신 이몽옥 선생님의 입선을 축하드리며 쓰신 글을 올려둔다.  

 

외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의 유랑기

이몽옥

 2018년은 해방이 된 지 73년이 되는 해이자 내 나이 73세가 되는 해이다. 한국을 떠난 지 53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광복 73년을 기념하는 문예작품 공모라는 광고를 보고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서 문화의 격동기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나의 외할아버지를 소개하기 위해 컴퓨터 뚜껑을 열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절 연희전문 1회 졸업생으로 서울에 있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다. 1913년 외할아버지의 첫 딸인 나의 어머니가 태어나셨다. 1919 3 1일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그날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학생들이 외할아버지가 담임하고 있던 반의 학생들이었다. 할아버지는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었고 일주일 수감 생활을 마치고 평북 선천으로 돌아오셨다. 그 일로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졌고 교사자격증을 박탈당하셨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 임시정부 사람들을 만났고 임시정부의 누군가가 주선해 준 가짜 여권(중국인 여권)을 가지고 미국행 배에 올랐다. 할아버지가 탄 배가 인도양을 지나 불란서에 도착했을 때 허름한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한국 남자 두 사람이 나타나 연락이 올 때까지 불란서에서 기다리라고 했단다.  

 당시 미국에 입국한 한국인들은 신분이 불확실하기도 하고 연고자가 없다 보니 일자리를 잡기도 어려웠고 때로는 도둑으로 몰려 붙잡히기도 했었단다. 이런 일들로 미국 정부는 입국심사를 강화했고 만일 입국을 거절당해 한국으로 추방된다면 난감한 일이 생길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연락을 기다리며 13년을 불란서에서 사셨는데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사고로 천주교 병원에 입원하면서 마침 한국으로 선교를 하러 가시는 불란서 주교님의 통역을 제안받으셨단다. 외할아버지는 불란서에서 기차를 타고 러시아를 지나 한국으로 돌아오셨는데 일본 경찰서에서는 기차역에서부터 우리 집까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해 길을 청소했고 환영을 해주었고 미행을 당했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불란서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불란서 여자들은 버스나 대형트럭을 운전하기도 하고, 공장을 운영하고, 농사도 짓고, 심지어는 기차를 운전하는 등 못 하는 일이 없다고 하시며 여성 천국임을 강조하셨다.

 12년이 지나 1945 8 15일 해방과 더불어 할아버지에게 찾아온 또 다른 감시망은 이북의 공산주의였다고 했다. 이북에서 서기관으로 일하신 외할아버지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이유는 비밀회의 때마다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인 외할머니를 비롯해 외할아버지의 딸들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남인 서울로 도망을 하였기에. 1950 6 25일 육이오 사변이 일어났을 때 외할아버지는 이남으로 야반도주해 오셨는데 외할머니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남 정부에서도 외할아버지는 감시의 대상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정기적으로 경찰서에 가서 보고해야 했고 늘 미행을 당했었다. 할아버지의 최후선택은 제주도로 주거지를 옮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제주대학교에서 강의하시며 여생을 보내셨다. 늘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문 외할아버지에게 학생들은 파리의 신사라 불렀고 가까이서 함께 생활하던 이웃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불란서 거지라 불렀는데 할아버지 손에서 떼어놓지 않은 커피잔이 당시 거지들이 들고 다니던 깡통과 비슷하여 생긴 별명이었다. 나는 이런 외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고 색깔 있는 남자라고 평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노처녀 경찰관과 결혼을 하겠다고 아이처럼 떼를 쓰시던 모습이다. 어쩌면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외할아버지는 국적이 없는 사람처럼, 외로운 나그네처럼, 김삿갓 같은 모양새로 살아가면서 정신적인 불안감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외할아버지 무덤 앞에서 오열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집안 모임 때마다 슬그머니 사라지곤 하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불란서에서 화폐개혁 이전에 사용했던 불란서 돈을 수시로 꺼내 보시던 모습이 그러하다.

 

 나의 외조 할아버님은 땅을 팔고 사람을 사서 허리춤에 돈을 숨겨 중국 봉천으로가 중국 돈으로 바꾼 다음, 중국에 있는 불란서 은행을 통해 외할아버지에게 돈을 보내드렸다고 했다.

 우편의 한 번 왕래는 육 개월, 답장을 받기까지는 일 년 이상 걸렸다고 했다. 엄마는 당신 아버지와의 생활은 가슴 조이는 기억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미국 선교사가 엄마에게 풍금을 가르쳐주어 교회 성가대 반주자로 또 학교 선생으로 일을 하셨단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 나의 여자 형제들이 있는 미국에 이민을 오셨고 북미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우리 형제들 집으로 돌아다니시며 열세 명의 손주들을 길러주셨다.

 엄마는 1996년부터 6년 동안 양로원에서 마지막 삶을 보내셨는데 이때 비로소 오락 강사를 도와 피아노 반주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맨해튼의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지는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인 2001 9 10일 뉴욕에서 엄마의 장례식을 치렀다.

 보편적인 선택이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하는가 보다. 나 역시 스무 살이 되던 해 1964년 대학교 학기말 시험을 치르고 비행기에 올랐다. 완행열차를 타듯 3일에 걸쳐 5개국을 경유해 독일 땅에 당도했다. 나의 목적은 독일어를 잘해 통역원이 되는 것이었다. 밤낮으로 치열하게 독일어 공부를 했고 통역원이 되면서 결혼을 했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970년 독일을 떠나 캐나다에 이민을 왔다. 2002년 퇴직을 했고 두 아들과 다섯 손자 손녀를 두었다. 지금은 노후의 삶을 보장해주는 캐나다에서 복지 혜택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1919년부터 2018년까지 100년의 세월은 외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의 유랑기였다.   

   

 <어제 있었던 최종심사에서 "외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의 유랑기"가 입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시상식은 8 15 11시 한인회관에서 있는 73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거행됩니다. 11 15분 전까지 한인회관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가족, 친지들과 함께 오실 것을 권장합니다. 참석 여부를 알려주십시요. 애국지사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