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본 시니어 대학 봄학기 글쓰기 강좌 3>
<잔등노을/정연희>
소잔등에 부르르
바람이 올라타고 있다
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
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
억센 풀은 뿔이 되고
오래 되새김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
스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
온갖 풀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
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
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
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두머리 같다
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
온돌방 같은 소 한마리
눈 안에 풀밭과
코뚜레 꿴 굴레의 말(言)을 숨기는
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 거린다
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
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는 날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
철썩철썩 박자를 맞추고
저 불그스름한 노을은
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201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심사평: 선자(選者)들은 우수한 작품이 많아 황금 나락 펼쳐진 들판 앞에 섰을 때 처럼 행복하기도 했지만 고민도 컸음을 토로했다. 신문의 특성 때문인지 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아 진부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기우였다. 두부처럼 반듯하고 말랑말랑한 작품보다 비지처럼 좀 거칠더라도 마음에 씹히는 질감이 있는 작품들이 결국 남았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잔등 노을’은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하다. 대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읽힌다. 직유를 줄여 행간의 이미지를 더 증폭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덮고 그 치열한 힘이 그려낼 미래를 믿어보기로 했다. 치열함으로 치열함마저 넘은 담담한 마음이 이미 싹트고 있음도 보았다. (함민복, 황인숙 시인)
-박은지: 1985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당선소감: 소의 눈을 들여다보면 “다 안다, 네 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날 묻고 싶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한참 동안 바라본 소의 눈이 오늘은 내 눈 속에서 “다 안다, 그 맘”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만 같습니다. 눈을 뜬다고 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 나오기 위해 스위치만 찾으려 한 시간들, 세상은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제 갓 꽃눈을 뜬 여린 풀꽃, 온 세상의 모든 빛이 다 내 것이 된 그 풀꽃같이 눈부신 날입니다. 주름진 시간들에 푸릇한 이파리가 달리면 온갖 춤이 찾아오겠지요. 어디 춤뿐일까요? 온갖 바람의 종류와 비와 폭염이 찾아오겟지요. 그러면 저는 온갖 춤을 배우고 추임새를 준비하겠습니다. 서툰 춤사위에 추임새를 넣어주신 황인숙 함민복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상쾌한 추임새는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세상의 시간들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늦동이 딸에겐 미안한 시간들이었지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더 없이 행복한 날입니다. 착하고 묵묵한 <농민신문>에 당선되어 더없이 기쁩니다. 저의 모든 수식어들은 소의 눈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정연희: 1958년 전남 보성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경기 용인수지우체국 근무, 김유정 기억하기 등대문학상, 생명문학상, 동서문학상 수상, 김삿갓 전국시낭송대회 우수상 수상, 용인문학회 동서문학회 회원.
<목판화/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는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패인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분 당선작
-심사평: “언어를 다루는 말솜씨는 있다. 말들을 재미나게 쓰기는 썼다. 그래서 내용이 불확실하지만 싱겁지는 않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재주만 가지고 시를 너무 쉽게 쓴다. 그런데 삶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않아서 말의 유희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는 본선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다. 이 대화 속에 오늘날 신춘문예 투고 시의 문제점이 깊이 드러나 있다.
가능한 한 위의 문제점을 불식시킬 수 있는 작품을 고른 끝에 진창윤의 ‘목판화’, 고은진주의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 이언주의 ‘사과를 깍다가’ 등 3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는 장어를 잡아 생계를 잇는 한 가족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풍경이 그려져 있으나 시적 응집력이 약하고 산만하다는 결점이 두드러졌다.
‘사과를 깍다가’는 사과를 딱다보면/ 툭, 껍질이 끊어지는 소리/ 꼭 눈길을 걷던 당신이/ 뒤를 돌아볼 것 같아”등 서정적 개성이 두드러진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단순한 소품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목판화’는 ‘시로 쓴 목판화’의 구체적 풍경을 통해 시적 형성력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호감이 갔다. 목판을 깍는 조각도의 칼끝을 따라 눈 내리는 겨울밤 골목을 배경으로 삶의 고단한 한순간이 진솔하고 과장됨 없이 그려져 있다. “불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라든가,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삶과 시가 유리되지 않고 일체화되어 있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자폐적 언어의 유희화가 왜곡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시단에서 이러한 구체적 형성력의 높이를 지닌 시를 만난 것은 큰 기쁨이다. (심사위원: 황동규, 정호승)
-당선 소감: 영상의 시대, 예술의 죽음을 선언한 시대, 문자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라고, 가려움에 견딜 수 없어 토하고 마는 어떤 묵상이라고 믿으며, 자꾸만 녹아 들어가는 빙산 위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형도 때문이었습니다. 2년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시만 읽고 시만 썼습니다. 아니, 시 흉내를 냈습니다. 색이 다른 단어가 문장 속을 헤엄치다가 잠들다가 했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좀 더 간절해야 한다고, 좀 더 절박해야 한다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동화적 상상력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스쳤을 뿐인데, 뭐가 묻어난다는 말을 듣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연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어떡하면 지루하지 않게 말할까 고민하겠습니다.
이제 돌아오지 못할 길에 들어셨습니다. 속절없이 주어진 시간을 무모하게 써 내려 가겠습니다. 부질없음을 탓하지 않고, 그냥 습관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며 무지렁이처럼 살아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거울 속의 나를 몰라보고 그냥 웃습니다. 들어가는 문은 있으나 나가는 문은 없습니다.
서툴기 짝이 없는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석대 문창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독하게 살겠습니다.
-진창윤: 1965년 전북 군산 출생/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사월의 눈비/이순섭>
새싹에서 피어난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를 품은
사월의 중순에 보암직한 눈길 끄는 봄꽃들은 아직인가
만물의 부활을 보게 하는 화창한 사월은 겨울로 퇴보했는가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듯 동장군이 사납게 몰려와
사월의 대지 위에 은백색 물감으로 온 세상을 물들였네
하늘의 선물인가 새봄을 질투하는 장난인가
사월에 구경할 수 없는 눈비바람 우리네 뺨을 후려치고 도망가네
눈을 뜰 수 없이 무자비하게 몰아치니
사월에 어울리지 않는 목도리를 감싸 쥐고 허둥지둥
수북이 쌓인 눈길은 행인의 발걸음을 더듬게 하고
눈 녹은 찻길, 달리는 차들이 튕겨주는 흙탕물은
물총 맞은 행인들의 발걸음을 놀라 멈추게 한다
몰아치는 강풍은 육중한 몸무게를 이기고자 씨름을 시키고
맞싸워 이기려 안간힘을 쓰던 몸은 속절없이 굴복할 수밖에
포근히 쌓인 눈송이는 스펀지 같이 푹신함으로 언 몸을 포근히 안아준다
입을 앙다물고 몰아치는 눈바람을 거슬러 일어서길 몇 번
눈은 혹여 누가 보았을까 사방으로 두리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사월 중순에 맞아 보는 강풍을 동반한 눈비, 그 위력이 대단하다
앙상하게 진이 빠진 고목들은 몰아치는 강풍에 힘겨워
걲이고 부러지고 맥없이 넘어져 길을 막고 무참히 누워있다
사월에 어울리지 않게 거꾸로 가는 봄이 애처롭구나
봄
진양순
토론토에 봄이 오길 기다린다.
유달리 매섭고 긴 겨울의 끝자락이 얼음 눈(아이스 스노우)에 덮여 아직도 숨을 쉬지 못할 명이를 생각한다.
처음 명이를 본 것은 3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모습으로 향기를 날리며 다가왔다. 마치 봄의 전령처럼…
그때 우연하게도 작가 황석영씨 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명이는 우리나라 울릉도 비탈지고 척박한 땅에서, 추위를 견디고 대지에 아무것도 없을 때 처음 돋아난 풀인데, 그걸 소들이 속이 쓰리도록 먹고 자랐기 때문에, 그 육질이 최고이고 그걸 명이 이파리에 싸서 먹는 것이 서울에서는 요즈음 유행이라 했다.
새삼 두고 온 땅들에 그리움이 쌓일 때,
새삼 무심코 스친 지난 날의 어리석음에 목이 멜 때,
울릉도 쇠고기는 아니더라도 앵거스 쇠고기를 명이 이파리에 싸서 온 가족에게 한가득 봄을 안겨주고 싶다.
딸
진영상
요즈음 딸 둘을 부러워하는 분들을 만나면 우리는 쉽게 큰딸 작은딸이라 부른다. 키나 체구는 큰딸이 작고 작은딸이 크다. 다섯 살 터울도 있지만 마음이나 부모에 대한 배려심은 큰딸이 크고 작은딸이 적으니, 합당한 호칭이 될 수 없겠지?
아름다운 우리말의 맏딸, 막내딸이라 부르는 것이 차별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 되고, 선승의 경책인 분별심을 내려놓는 수련도 되며, 혹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첫 시니어 대학 글쓰기반 숙제도 해결되는 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
내 삶의 내력
이수연
나는 부천군 소래면 은행리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동네는 찬우물집 뒤 뒷동산 너머는 검바위 앞에 보이는 건너 마을이 있었다.
시골이라 봄이 오면 파릇파릇 새 생명이 태어났다. 마당 끝에 바람에 휘날리는 풀을 뜯어서 소 먹이를 해준다고 나는 작두에다 풀을 먹이고 작은 오빠는 작두를 누르고 있는 순간 나의 손끝이 잘려 나간 것이다. 내 나이 세 살이었다. 엄마는 놀라시며 풀을 헤치니 너무 작아서 찾지 못하고 손가락 병신이 되고 말았다.
어느덧 일곱 살 엄마의 손을 잡고 논밭을 걸어서 강습소에 갔는데 나는 엄마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쭉쭉 빨고 있을 때 아니 젖 먹는 애기를 데리고 왔냐고 하는 것 같았는데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 먹고 있었다.
학교에 가면 마당에 세워놓고 ‘아리라와 고고꾸 신민나리’라고 외운 것 같았다. 더 많은 것을 외웠는데 생각이 안 난다. 그때에는 잘못하면 토막 위에 세워놓고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었다.
학교에 안 간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 시절에는 돈이 아니고도 곡식 같은 것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난다. 8.15 해방이 되어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논밭을 걸어서 정식 학교를 가는 것까지만 생각이 나고 그다음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국민학교 6학년 때 6.25가 났다. 부모님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꽝꽝 소리가 나니까 비가 얼마나 많이 오려고 천둥을 치며 하늘이 새까마냐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6.25가 난 것이다.
열세 살 겨울에 피난을 가는데 지나가는 할아버지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고 눈썹도 하얗고 그래도 추운 줄 모르고 피난 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이불을 둘러 그 안에다 아기를 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그때는 그것을 보고도 불쌍하긴 하지만 아무 생각도 안 났다.
27살에 어느 대학 총무과에 근무하는 남자와 중매로 결혼해서 1남 2녀를 두게 되니 그때 아기 생각이 났다. 지금은 캐나다에 있는 아들이 우리를 초청하여 여기 와서 살게 되었다.
토론토로 온 지가 벌써 7년 어릴 때는 엄마손에 이끌리고 내 나이 80이 되니까 며느리 차에 실려 갤러리아 문화교실과 본 교회 시니어대학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시 아기가 되는 기분이 든다.
졸혼 생활
이몽옥
2014년 1월부터 남편은 아래층, 나는 이층에서 졸혼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집의 구조는 앞면에선 방갈로이지만 뒤면에서 보면 이층 집이다. 면적도 같고 구조도 화장실 하나 부엌 하나 입구 문도 아래 위로 하나씩 있다. 두 집 살림을 하기엔 안성맞춤이다.
2002년도 한국을 떠난 지 삽십구 년만에 정년퇴직과 더불어 한국을 다녀오고부터 분노조절이 안되었다. 기침을 장장 팔 개월 동안 했으며 항생제를 세 번 복용했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갑상선 수술을 받았고, 불면증에, 상황판단이 안 되는 등 막막한 생활을 하면서 집안에 나를 가두었다.
남편은 마약을 복용한 환자처럼 마음이 붕 떠있었다. 상황판단이 안 되는 십대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를 간다며 새벽에 나가 열 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곤 했다. 노상 식당에서 밥을 사 먹고 술 마시고 여종업원들에게 여유 있는 팁을 주고 빠칭코에 다니면서 나와는 한순간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봐 미리 소리를 지르고 트집을 잡아 야단쳤고, 돈을 감추고 거짓말을 했다. 또 인기인처럼 찾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셀터로 또 여자 형제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피난을 가보기도 했고 남편에게 편지도 썼고 사정도 하는 등 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2013년 어느 날 나는 스트록(뇌출혈)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한번 스트록이 오면 반복된다는데라는 생각에 무서웠다. 스트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비틀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겁이 났고, 무엇을 위해 그토록 투쟁하며 살아왔나 싶었다.
남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자신이 갖겠다고 했고 한 달에 육천 오백 불 수입이 되는 건물들은 나에게 주겠다며 한글로 종이 위에 써 주었다. 그날 나는 한인 변호사를 찾아갔고 같은 날 세 들어 있는 세입자를 찾아가 건물을 사라고 삼 일간 말미를 주며 조건은 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건물은 팔렸고 두 달 후 돈을 받던 날 나는 아들들에게 돈을 빌려주며 집을 사라고 했고, 한국에 있는 시누이에게도 마지막 선물을 보냈다. 월부로 산 자동차 대금도 지불했고,세금을 냈고, RRSP를 샀고, 만 불 정도 남은 돈을 남편의 통장에 넣어주며 집을 수리하라고 했다. 백삼십만 불이 넘는 돈을 한 시간 안에 모두 없애버린 셈이다.
우리의 연금수입은 RRIP까지 합해 삼천 불이 조금 넘는다. 자동차 두 대와 집을 관리하고 골프비까지 제하고 나면 천 불이 조금 안 되는 돈으로 식비와 용돈을 나누어 쓰면서 살고 있다.
지난날들을 더듬어 보면 우린 한 집에 살면서 교대로 생활을 했었기에 가정 파탄을 면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편이 가게로 나가면 나는 식사 준비 등을 해놓고 가게로 갔고 내가 가게로 나가면 남편이 집으로 와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도매시장으로 나가 물건을 구입하고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오후 네 시 남편이 가게로 돌아오면 이후부터는 자유로이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영어교실과 컴퓨터교실에 출석하고, 캐네디언 성가 합창단 예멜 합창단 멤버로 노래도 부르고, 도서관이나 수영장에도 갔었다.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도 만났다. 저녁 여덟 시면 가게로 돌아가 남편과 함께 가게 일을 마무리짓곤 했다. 남편은 혼자서 한국에도 가곤 했다.
나는 친정식구들이 있는 미국에 비행기나 기차, 버스를 타고 다니며 남편과 함께라면 행복은 곱이 될 거라고 기대를 했는데 일선에서 물러난 우리는 매 순간 부딪히며 공감하는 것이 없었다. 일선에서 물러날 때 나는 남편으로부터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줄 알고 고대했었는데 남편은 평생 사고만 치는 마누라 뒷수습만 했노라고 소리를 질러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억울해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생각해보니 하루도 쉬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일을 했던 남편의 수고로 지금의 결과를 맞은 것이라 여겨졌다.그래서 남편에게 당신이 열심히 수고해서 지금의 결과를 이룰 수 있었으니 고맙다고 했다.
‘강물이 깊지는 않지만 물살이 센 곳을 건널 때는 돌을 머리에 이고 간다’는 말이 있다. 이렇듯 바다와 같은 우리네 인생행로를 잘 관리하려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목적이나 책임을 지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유혹의 덧(혹은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리라. 어쩌면 우리는 너무 과한 짐을 지고 강을 건너오느라 서로 바라볼 겨를도 없었고 제대로 소통을 못했던 건 아닐까.
2014년부터 시작한 졸혼 생활은 우리에게 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경제권을, 모든 것을 반반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집 안팎을 관리하고 고기를 굽기도 하고 연애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맥주도 함께 마신다.
누름돌
정성려
그런대로 아담하고 반질반질한 항아리 속에서 노란빛이 어린 오이지를 꺼냈다. 펄펄 뛰는 오이들을 사뿐히 눌러 진정시켜주던 누름돌을 들어내니, 쪼글쪼글해진 오이들이 제 몸에서 빠져나간 물에 동동 뜬다. 항아리 속의 오이는 볕이 들지 않은 음지에만 있어야 하기에 조금은 서먹하지만, 누름돌 무게로 숨을 죽이며 제 몸속 물을 토해내고, 간기가 스며들면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숙성되어 짜릿하고도 오독거리는 맛을 냈다. 이렇게 숙성된 오이를 맛깔스럽게 썰어 참기름을 치고, 갖은 양념을 넣어 무치면 그야말로 침이 절로 돌며 식욕을 돋운다. 그래서 오이지는 여름철 내내 우리 집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밑반찬으로 각광을 받는다.
오이지를 유독 우리 집 식구만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입맛이 없거나 시간에 쫓겨 바쁠 때는 찬물에 밥을 말아, 빠르고 간단하게 먹는 반찬으로 오이지가 제격이다. 아삭아삭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나는 소리는 옆 사람까지도 입맛을 돋게 해주는 밥도둑이라 해야 맞겠다.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이 어디 오이지뿐이겠는가. 깻잎이며 풋고추 등으로 장아찌를 담그자면 누름돌의 역할이 중요하다. 누름돌이 아니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물에 담아놓은 재료들이 동동 떠오른다. 그러면 숙성시키지 못해 제 맛을 낼 수가 없다. 이토록 깊은 맛을 나게 해주는 누름돌이야말로 단연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지혜다.
음식솜씨가 좋은 집에서는 대물림한 누름돌 한 두 개쯤은 볼 수 있다. 우리 집에도 둥글 넓죽하고 반질반질한 모양의 크고 작은 누름돌이 여러 개 있다. 냇가에 갈 기회가 있을 때면 오이지나 장아찌 담을 때 좋겠다는 생각에 주워온 것들이다. 많은 비가 내려 큰물이 질 때면 물살에 떠밀려 이리저리 나뒹굴며 매끄럽게 갈아지고 널브러져 있던 돌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되어 우리 집에 온 뒤, 그 쓰임새가 생기며 꼭 필요한 존재의 누름돌이 되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다슬기 탕을 유난히 좋아했다. 물이 깨끗하고 넓은 냇가가 집 앞에 있어서 그랬을까?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 할머니께서는 집 앞 냇가에 다슬기를 잡으러 자주 가셨다. 다슬기를 잡아 돌아오실 때는 둥글 넓죽한 예쁜 돌을 하나씩 안고 오셨다. 나와 동생은 다슬기를 잡으러 가는 할머니를 따라 냇가에 가기라도 하면 모래로 집을 짓고 자갈과 돌로 담을 쌓는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예쁜 돌을 많이 주워 모아놓기도 했다.할머니는 우리가 모아놓은 많은 돌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것 하나만 골라 집으로 들고 오셨다. 그런데 그 돌이 누름돌이었던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어디에 사용하려는 것인지조차도 몰랐다. 우리는 할머니 주위를 깡충깡충 토끼마냥 뛰어다니며 일상적인 놀이로 즐기며 놀았다.
재료를 지그시 눌러 음식의 맛을 나게 하듯, 사람에게도 묵직한 누름돌이 필요하다. 딸을 출가시킨 지금 돌이켜 보니, 친정어머니는 묵직한 누름돌을 늘 가슴에 품고, 힘들고 어려웠던 삶을 누르고 살았던 것 같다. 아니, 나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옛날 어머니들은 모두 그랬으리라.
그 옛날 여자이기에 학교를 모르고 살았으니 교과서에서 배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오롯이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당신 자신을 꾹꾹 누르고 희생하며, 어렵고 힘든 시대를 견디어 내셨다. 누름돌을 가슴에 안고 그 무게로 누르고 삭히며 살았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내 삶의 지침이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환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묵묵히 참으며 지혜를 짜내어 기어코 극복하시던 진정한 승리의 모습으로 동그랗게 내 가슴에 떠오르며 누름돌 하나를 안겨주신다.
아버지께서는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 6남매, 그리고 많은 농사일까지 어머니의 몫으로 맡기고, 너무도 서운한 나이 60세에 무정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후 3년 뒤, 할머니도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기가 힘드셨던지, 기력을 잃고 시름시름 하시더니 유명을 달리하셨다. 결국 홀 며느리가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자식 6남매를 가르치며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도 90세가 되면서 서서히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힘든 상황에서도 할아버지는 치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그러는 거라며 나이 탓으로 돌렸다.
세월이 갈수록 자식과 손자들도 몰라보셨다.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수발하느라 얼마나 힘이 부치셨을까? 그래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당신의 멍에로 생각하고 자식들의 등불이 되어 주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셨다.
내가 역경에 처할 때마다 친정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면 힘들게 느껴지던 고통의 무게가 조금씩 가볍게 줄어든다. 게다가 이겨내야겠다는 용기까지 얻는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면서 장롱 속에 묻혀있던 효행상장을 발견했다. 각각 다른 단체에서 수상한 것으로 4개나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며 가문의 얼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자식들은 어머니께서 시장에 서너 번 다녀온 것쯤으로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렸고, 의미도 크게 몰랐다. 자식이라면 부모님께 당연히 해야 한다는 도리로 생각했었다. 무심이 바로 무식이란 걸 이제야 알게 해주었다.
치매를 앓던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농사일로 옆집에 잠시 들려야 하는 틈조차 주지 않았다. 하물며 마을단합대회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토록 암울한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며, 시집 온 후 50년을 넘게 시부모를 모시고 사셨던 친정어머니다. 할아버지께서 97세에 돌아가셨는데도, 두고두고 잘못했던 일만 생각난다며 슬퍼하시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이기에 해냈으리라. 사람이 부대끼면서 미운 정과 고운 정이 든다던데, 우리 친정어머니는 할아버지와 고운 정만 들었을까?
그런데 난 그토록 지고하신 친정어머니를 닮지 않았나 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얼마나 힘들어 했던가? 건강하실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일들이 중풍과 치매를 앓으면서 본의 아니게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시어머님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를 수도 없이 했었다. 막내인 우리 부부가 책임을 떠맡은 것 같아 가슴앓이를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것이 덕이 되었고, 딸자식들에게는 산교육이 되었으련만, 그때의 처지를 한탄하며 힘들어 했던 일이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하다. 어찌 내게는 가슴을 누르고 삭혀주는 누름돌이 없었던가.
우리의 전통적 토속음식은 대체로 장시간 삭혀서 맛을 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곰삭아 깊은 맛이 들고 발효되어 양약보다 더 좋은 효능을 인정받지 않던가.
요즘 내게도 묵직한 누름돌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라도 감정을 꾹꾹 눌러 줄 수 있는 누름돌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겠다. 항아리 속의 시퍼런 오이를 지그시 눌러 삭혀서, 깊은 맛을 내어 오이지로 탄생시키는 것처럼, 진정한 좋은 사람의 향기를 숙성시켜주는 누름돌 하나쯤 가슴에 꼭꼭 품고 살고 싶다.
- 201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 심사평 : 2018년도 신춘문예 수필부문 응모작은 97명이 보내 준 302편이었다. 수필로만 따져서는 수필집 5권 분량이었다. 응모작 편수는 지난해보다 조금 늘었다. 이 정도면 예선에서 가려 10여 편 정도를 최종심에 올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 모두를 읽어보아야 하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응모자의 분포는 전국적이었고, 해외에서는 뉴질랜드와 캐나다, 일본 등 지구촌에서도 응모했다. 응모자들은 나름대로 꿈을 키우며 심사숙고하여 창작을 했을 것이고, 저마다 당선의 꿈을 키우며 다듬고 다듬어 응모했을 테니 한 편 한 편마다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응모자들은 저마다 2편에서 4편까지 보내주었고, 응모작 겉표지에 응모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보내주었다. 그런데 응모자 주의사항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는지 응모작품에 인적사항을 기록한 이도 있고, 응모작 매수를 지키지 않는 이들이 있으며, 활자크기도 10포인트로 인쇄를 하여 보내준 이들이 있어서 아쉬웠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면 신문사가 요구하는 주의사항을 꼼꼼히 읽고 응모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수필작품의 수준은 비교적 높아진 편이었다. 소재가 광범해졌고,간결하고 부드러우며 쉬운 문장으로 다듬어져,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 작품들 중에서 단 한 편을 뽑아야 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응모작들은 저마다 작품제목만 볼 수 있을 뿐 응모자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전체 응모작 302편의 수필 중에서 1차로 15편을 뽑고, 그 15편 중에서 다시10편으로 압축했다. 그 10편 중에서 또다시 5편을 뽑았다. 최종심에 오른 수필은 「무현금」「이쁜 선생이 왔네」「내 눈 속에 아이를 넣어 주오」「누름돌」「양면시계」등 다섯 편이었다. 이 다섯 편을 읽고 또 읽은 결과 「누름돌」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누름돌」은 구성이 탄탄하고, 문장이 매끄러우며, 형상화와 의미화가 잘 이루어져 독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작품었다. 무엇보다도 오이지를 담글 때 사용한 누름돌과 치매 걸린 홀시아버지를 모신 친정어머니를 대비하여 감동을 자아낸 인생이야기였다. 이 작품이 심사자의 마음을 끌었다.
수필은 가르치는 글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글임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며, 정의 문학, 겸손의 문학임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간발의 차이로 밀린 응모자들에게는 더욱 정진하여 다음 기회를 대비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김학 수필가)
-당선 소감 : 흥분 된 감정을 누르며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하던 일을 마치고 이 기쁜 소식을 남편과 딸들에게 먼저 알렸다. 그리고 육남매 내 동생들과 좋은 일 힘든 일을 공유하는 단체 카톡 방에 올렸다. 딸들과 동생들의 축하 메시지가 다발적으로 한꺼번에 쏟아졌다. 기쁨에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자꾸 흘러내린다. 엄마 생각이 앞선다. 동생들도 기쁜 소식에 나처럼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먼저 난 모양이다. 카톡 내용에서 그렁그렁 눈물 맺힌 동생들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작은 동생은 당장 친정어머니 산소에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고 오겠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수필을 알게 되었다. 수필은 내 인생 봄날의 시작이었다. 수필을 배우겠다고 평생교육원의 문을 들어서고 오랜만에 쓴 첫 작품을 문우님들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첫 작품이 제대로 된 수필도 아니었지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부터 열정이 생겨 일기 같은 어설픈 수필을 마구 썼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누에고치처럼 내면의 실을 줄줄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이다. 문우님들의 칭찬의 힘이었다. 칭찬의 힘이 이렇게 크다는 걸 느꼈다. 한 때 다른 일에 치우쳐 바쁘다는 핑계로 수필을 쓸 생각도 않았던 때도 있었다. 수필을 알게 되어 노후에 수필세상에서 즐겁게 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힘이 있었다. 믿고 지켜준 든든한 버팀목 남편, 넉넉하지 못하고 부족하기만 했을 터지만 착하게 커준 네 딸들, 변함없는 애정으로 서로 의지가 되었던 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하늘에 계시지만 누름돌의 수필을 낳게 한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께도 감사드리고 싶다. 아마도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다면 무척이나 흐뭇해하실 거다. 항상 응원으로 힘이 되어주신 분들과 가슴 벅찬 기쁨을 함께 하겠다.
그리고 함께 공부했던 교수님과 문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부족한 글이지만 뽑아주신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린다. 제가 모든 분 들게 보답하는 일은 문학세계에서 더 품격 높은 수필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정성려씨(58)>
<명사는 이미지를 가진다>
물질명사는 이미지를 가진다. 상태가 있는 명사는 머릿속에 이미지로 저장되는데, 글을 읽으면 독자는 물질명사의 화소들을 결합해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명사의 특징은 논리성, 상징성, 압축성이다. 문장 안에는 이러한 성질들이 분리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당구공처럼 서로 충돌하고 움직이면서 영향을 미친다.
(예문1)
아버지가->사립문 안으로 들어왔다/ 지게를 내리고/ 나뭇단을 부려놓았다/ 나뭇단에 꽃힌/ 진달래 한 다발을 들었다/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에게 건넸다/ 흠흠 헛기침하며/ 뒤란으로 갔다/
머리로 그림을 그려보자. 아홉 컷 사진이 슬라이드처럼 순서대로 나열된다. 수사법이 있거나 수식이 있거나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명사와 그것을 보조하는 조사에 동사만 붙여 서술하는 구조다. 단순한데도 ‘쑥스러운 사랑’이라는 추상의 집 한 채 짓는 데 모자람이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문장을 구성하는 명사에서 유추하고 연상되는 관념이나 상징을 나열해보자.
사립문-시대, 민초의 집, 허름한 문
지게-인생, 육체노동
나뭇단-건강한 노동의 산물, 구들을 데우는 땔감
진달래-초봄, 분홍빛 순정, 마음을 대신하는 상징물
부엌-아내의 공간
헛기침-딴청
뒤란-숨거나 피하는 곳
이러한 연상 또한 관념이다. 사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경험을 통해 그것의 이미지와 속성과 특징등을 어떤 형태로든 머릿속에 기억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거나 읽으면 이러한 관념이 상호작용을 하거나 결합해 형상을 만드는데, 필자와 독자가 떠올리는 형상은 일치하지 않는다.
<형상(形象 形狀 形想)->형태, 그림을 말하지만 이상향이나 깨달음 같은 관념에만 존재하는 세계를 포함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하는 상징물을 ‘참꽃’으로 쓰면 어떨까? 진달래와는 어감이 약간 다르므로 독자의 심상에 약간 다른 변화가 일어난다. 참말, 참사랑,거짓 없는…, 이처럼 명사의 이미지와 어감은 독자의 심상에 영향을 준다.
수식이 없는 글은 담백하지만 한 편으로는 채도가 밋밋하다. 그러면 한 문장을 골라 수식을 더해보자’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어머니에게 건넸다.
이렇게 하면 캐릭터가 더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뼈대만으로 구성된 문장에서 관형어는 명사의 의미와 채도를 살리는 생생한 이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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