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전화 통화에서 딸이 해준 말이 무척이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구나. 딸은 이렇게 말했지. “어떤 환자들을 대하면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겨져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어요.”라고 말이다.
그중 한 환자는 70대 여인이었는데 엉덩이뼈에 금이 가서 통증 때문에 많이 아파한다고 했었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 3층에 살기에 걸어 올라가야 하는 데 아픔을 참고 오르내리기가 힘들다고 말이다. 나이든 할머니를 보살펴야 하는 그분의 딸도 일해야 하므로 어머니를 계속해서 보살필 수 없다고 하소연하더라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딸이 그 말을 하면서 사정이 딱한 환자 분이나 가족을 대하면 마음이 짠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었다.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긍휼한 마음이라고 생각해.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면서 사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닐까 싶구나.
아빠는 최근에 김형석 교수께서 쓰신 책을 읽고 있다. 중반부쯤 읽어나가다 보니 딸 생각이 나더구나 그래서 몇 줄 적기로 작정을 했어. 왜 갑자기 딸이 생각났는지는 나중에 직접 알아맞혀 보렴.
김형석 교수님은 내가 젊은 시절 무척 좋아하는 철학자이자 저술가셨다. 그분은 적지 않은 책을 쓰셨는데 출간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사서 읽곤 했었지. 1990년대 초반인가였을 거야. 아빠가 그분을 직접 초대하여 강연을 부탁드린 적도 있었단다. 이번에 동계올림픽이 열린 용평이라는 곳에 있는 리조트로 회사의 고객들을 초청하여 사은잔치 비슷한 행사를 연 적이 있었어. 그때 아빠가 김 교수님을 초청 강사로 모셨던 것이야. 당시 70대 초반이셨는데 정년 퇴임을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어. 온화한 얼굴과 평온한 목소리로 근황을 소개해 주시던 기억이 나는구나. 감사한 것은 100세가 되어가시는 데 글도 쓰시고 강연도 하시면서 건강하게 사신다는 점이야. 놀라운 일이지?
아빠는 또 요즈음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쓴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를 재미있게 읽고 있어. 최근 100년간의 한국역사를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고 연구하여 쓴 책인데 읽으면서 그동안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지지리도 못살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한 세기 만에 절대빈곤을 벗어남은 물론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게 너무도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하게 여겨지는구나. 내달 4월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가주석 간의 정상회담과 5월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주석 간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히는 듯해. 앞으로 두 차례 있을 정상회담에서 평화적인 조국 통일의 기틀이 꼭 마련되면 좋겠구나.
딸도 알다시피 아빠는 매일 아침 삼십 분에서 한 시간가량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신문인 토론토 스타(TORONTO STAR)를 읽으려 애쓰는데 요즈음은 신문이 편안하게 잘 읽힌단다. 물론 단어도 가끔 막히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설이나 기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교하면 막히는 부분도 적고 읽는 속도도 제법 빨라졌어. 언젠가는 한국신문을 읽는 것처럼 이곳에서 발행되는 영어신문들도 편하게 읽을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노력하였는데 서서히 결실을 이루어가고 있는듯해.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한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단다. 최근에는 성경을 영어로 외우는 노력도 해 가고 있는데 제법 잘 외워져서 아빠 자신도 조금은 놀라곤 한단다. 시 공부와 영어 성경 외우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번에 더 자세히 들려주도록 하마.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다운스테이트 병원(State University of New York Downstate Hospital)에서의 레지던트 생활을 마무리하고 펠로십을 위해 맨해튼에 위치한 병원으로 옮겨가겠구나. 맨해튼에서 살 아파트를 구하는 일과 이사를 하는 일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겠다. 하지만 좋은 명성을 지닌 코넬대학 병원(Weill Cornell Medical Center)에서 전문의 과정을 하게 된 것과 또 남편 Dr. Shin(신 서방)이 Mount Sinai Hospital에서 펠로우쉽을 하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니 조금 힘들더라도 잘 견디고 이겨내렴.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딸과 신 서방이 환자들을 내 가족이라 생각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진료하고 도와준다니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다. 사람이기에 때로는 힘들기도 하고 짜증 날 때도 있겠지만 전화에서 아빠가 당부한 것처럼 스트레스 관리 잘하고 두 내외가 서로 잘 챙겨주고 즐기면서 기쁘고 감사한 나날들 보내기를 소망한다.
이만 줄이마.
2018년 3월 26일
토론토에서 아빠가
앞에서 언급한 김형석 교수의 저서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 중‘아름다운 인연들’이라는 부분을 소개하마.
아름다운 인연들
김형석
자유를 믿는 사람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 중 어느 편이 더 많을까. 옛날 사람들은 운명의 신봉자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가장 지혜로웠다고 자찬하는 그리스인들도 운명은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만능의 신인 제우스도 결정되어버린 운명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운명론은 인도 사람들도 숙명적인 것으로 따랐다. 인도사상의 원천인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세상만사는 모두가 업보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전래되고 있다.
동양의 노장사상도 인과질서로 엮어 있기 때문에 운명론적 사고는 넘어설 수 없는 규범과 같은 삶의 질서라고 생각되어왔다.
독일의 니체 같은 철학자는 인간 의지를 가장 존중히 여기면서도 결국은 큰 삶의 울타리 안에서는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 철학의 결론을 짓고 있다.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는 없으나 많은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큰 울타리 안의 작은 자유를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 같다. 삶의 자유는 소중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며,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내 삶의 불꽃이 화려한 듯싶어도 무한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젊었을 때는 만사가 나의 선택과 노력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만 임종을 앞두게 된 많은 사람들은 ‘그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라고 자위하는 것이 인생일지 모른다.
이런 운명론적 사고를 약화시킨 개념 중 하나가 인연(因緣)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맺어지는 여러 성격의 사건들이 어떤 인연을 갖고 있으며 그 인연은 인과관계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옷깃이 서로 스치는 것도 모두 인연이라고 불교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피천득 씨의 수필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작품 <인연>을 빼놓지 않는다. 만남과 세월의 인연이 마음 잔잔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운명이나 인간관계 같은 철학적 논의에는 동참하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의 삶 속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사라져간 크고 작은 인연의 자취들을 찾아보게 되는 때가 있다. 내 모친이 일생에 걸쳐 수없이 되풀이한 이야기가 있다. 내 생명의 은인은 북진에 있었던 파워라는 의사였다는 것이다.
어떤 동기였는지는 모른다. 부친은 젊었을 때 평북 운산 북진에 있는 금광촌에서 일자리를 갖고 지냈다. 지하에 들어가 채광을 하거나 광산의 잡무를 위한 육체노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정확한 발음이나 스펠링을 알 수 없는 불랫지라는 토목 기술자 밑에서, 도로의 측량이나 경사도를 측정하는 조수로 일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근로자로서는 약간 고급스러운 직업이었을지도 모른다. 동료들은(그 뜻은 모르겠으나) 패장으로 불렀던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태어났다. 너무 병약했고 자주 경기를 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부모는 나를 데리고 그곳에 있는 유일한 병원으로 데리고 가곤 했다. 주치의가 미국 의사 파워였던 것이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어린 애기를 본 파워 의사는 정성껏 살펴보면서 계속 한숨을 쉬곤 했다는 것이 모친의 얘기다.
그래도 정성 어린 치료의 효과가 있어 내가 다섯 살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부친은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자기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파워 의사는 ‘이 애는 아버지가 의사나 되어야 살아갈 수 있을 텐데…’하면서 걱정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먹어야 할 약도 지어주고, 처방전을 써주면서 평양에 있는 기홀병원에 가면 친구 의사가 있으니 이 처방전을 보이고 10년을 더 복약해야 한다는 부탁을 했다.
아버지가 의학에 관한 책도 읽고 시골에서는 면허 없는 의사 대접을 받은 것도 그 의사의 충고를 따른 것었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열 살이 넘을 때까지 아버지가 평양서 갖다 주는 기름진 물약을 먹였다.
이렇게 자랐기 때문에 모친은 파워 의사를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고마운 분이었다. 그때 미국인들이 금광을 관리했기 때문에 나도 그 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미국 남쪽에 있는 한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끝내고 몇 곳에서 순회강연을 하다가 댈러스 시에 간 일이 있었다. 강연은 주로 교회에서 진행하곤 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오전에는 미국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같은 교회당을 빌려 교포들이 예배를 드리는 상당히 큰 교회였다. 내 강연은 오후 약간 늦은 시간에 배정되어 있었다.
이백 명 가까운 청중이 모였다. 교인들이 주가 되고 그 지역에 사는 교포들도 있었다. 강연을 하면서 보니까 내 정면 맞은쪽 층층대 한가운데 두 미국인이 앉아 있었다. 할머니로 보이는 여인과 그보다 약간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내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고, 여자분은 열심히 경청하는 자세이기는 해도 내 강연을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비교적 긴 강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나 옆방에서 다과를 나누며 담소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이도 많았다. 주최 측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그 두 미국인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내 강연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하고 물었더니 그렇지 못했다고 웃으면서 무엇을 좀 물어보아도 좋으냐고 여자분이 말을 꺼냈다.
“오늘 한국인들을 위해 서울서 교수님이 온다고 해서, 어떤 분이냐고 물었습니다. 평북 운산이 고향이고 1920년생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제가 옛날 운산에 살았고 여기 있는 아들이 1920년생입니다.”
오히려 내가 알아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주변 상황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 남편 되시는 분은 어떤 책임을 맡고 계셨나요?”
“제 남편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는데, 그 당시에는 채광 기술의 책임자였습니다. 교수님의 부친은 기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미국인들이 많이 가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저는 이 아들이 자라면서는 미국을 오가면서 아들의 학교생활을 돌보곤 했습니다. 운산에는 학교가 없었으니까요.”
“제 부친은 북한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모친만 함께 왔습니다. 아직 어머니는 건강하십니다. 서울에 계시구요….”
“그러면 서로 기억은 못하겠지만, 북진 일대의 환경은 지금도 머릿속에 떠오르곤 합니다. 저와 우리 가족들에게는 한국과 북진이 제2의 고향인 셈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4,5년 동안은 건강이 대단히 나빴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주 파워라는 의사의 도움과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드나들었다는데 혹시 그 파워 의사를 기억하십니까?”
“예, 잘 알고 지냈습니다. 제 큰아들도 같은 해에 태어났으니까 혹시 병원에서 서로 만나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어머니와 애들은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교수님 부친께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우리 큰아들도 정기적으로 파워 의사의 치료를 받곤 했습니다.”
“그 파워 의사는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도 살아 계시면 높은 연령이 되었겠는데….”
“한국에서 정년을 끝내고 2,3년 더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하이오 주에 머무셨는데 7,8년 전에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은 아직 살아 있는데 요사이는 방문객이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한국에는 다시 가본 일은 없으셨고요?”
“아들의 탄생지이기도 해서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기는 한데, 북한 땅이어서 갈 수도 없고요. 아들은 기술자입니다. 회사 일이 많아 좀체 휴가를 낼 수도 없답니다. 한국을 떠나올 때 반닫이 옷장을 하나 갖고 나왔어요. 지금도 친구들이 찾아오면 한국 얘기를 하곤 합니다. 파워 의사 집에 가면 한국 물건들이 많습니다. 그분은 골동품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인사를 나눠야 할 여러 사람이 있어, 어머니와 아들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나는 철들기 전 5년 정도를 운산에서 보냈지만 그 모자는 더 긴 세월을 이국 땅, 그것도 깊은 산간에서 보냈으니까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나를 찾아오기도 했고….
지금은 더 오랜 세월이 지났다. 파워 의사의 부인은 물론, 그때의 미국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나와 동갑내기 그 기술자도 작고했을지 모르고, 생각해보면 꿈같은 옛날 일들이다.
긴 사연이 지난 오늘은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내 슬하의 가족들이 미국에서 학업을 닦았고 여럿이 그곳에 살고 있다, 의사로 봉사하고 있는 가족도 넷이나 된다. 그중 한 사위는 파워 의사의 고향인 오하이오 주에서 살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파워 의사로부터 내가 받았던 은혜에 충분히 보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날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사랑으로 맺어지는 작은 인연들이 고맙고,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김형석 저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김영사刊, 2018년 2월) p101~107
<<김형석著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중 ‘머릿글을 대신하여(全文)’p4~7>>
나는 수필이나 수상문을 쓰는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젊은 사람들 인생에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 염원에서 태어난 것이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초창기의 작품이었다. 그 책의 메아리가 60년 가까이 되는 오늘에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그 내용에 관한 감사의 인사를 받는다. 심지어는 책에 등장하는 수도자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사회 현실도 숨 가쁘게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우리인간들의 근본적인 물음에는 변화가 없다.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누구에게나 남아 있다. 그것은 철학자나 종교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청소년의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 지도자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 문제를 외면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은 인간다운 삶을 찾아 누리지 못하는 불행한 인간이다.
나도 같은 문제를 갖고 백수(白壽)를 맞이하는 오늘까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온 셈이다. 그 열정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이전과 다른 바가 있다면 나 자신을 위한 고민보다는 우리 모두와 함께하는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아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질문을 공유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나를 포함한 철학도에 국한되지도 않으며 관심을 가져온 종교 지도자에게 맡겨둘 문제만도 아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문제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젊음을 거쳐 늙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분이나 직업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외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질문이다. 한 지성인으로서의 문제이기도 하나 지금과 같은 사회적 현실에서는 한 국민으로서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 물음에 대한 내 대답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많은 고통과 불행을 스스로 만들어왔다.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를 보고 선한 혜택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등지고 살았다. 개인의 욕망과 만족을 위해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들을 배신과 불행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사랑을 증오로 바꾸고 누구나 찾아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스스로 내던지는 어리석음을 택하기도 했다. 때로는 악마도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뉘우침 없이 감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선으로 향하는 의지가 사라진 것도 아니며 사랑과 아름다움을 염원하는 인간애의 희망이 소멸된 것도 아니다. 온갖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한 가지 무책임과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애의 결핍과 포기였다. 인간은 자신의 삶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내가 나를 위하는 것같이 서로가 사랑함으로 행복과 희망을 창조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태어났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경건한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면서 <영원과 사랑의 대화> 이후에 쓰여진 글들을 선별해 모은 것이 이 한 권으로 묶인 것이다. 첫 번째 글이자 표제작인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새로 써서 추가했다.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현재가 최상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통해 행복을 찾아 누리려는 신념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은 글들이기 때문에 좋은 글벗이 되리라고 믿는다. 글을 쓸 때 내가 가졌던 마음이 그대로 독자들을 통해 보람 있는 삶을 사모하는 이들의 소중한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쓴 글에 스스로 만족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마음의 다짐을 굳히기도 한다. 글은 저자를 떠나면 스스로의 내용을 갖고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지니고 있던 보물단지 속의 아끼던 물건들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마음의 선물로 내놓는 심정이다. 도와주신 여러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2018년 정월, 백수를 맞이하면서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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