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바라보며 그것에 착안하여 시를 쓴 박후기 시인의 예리한 눈에 경의를 표한다. 그렇다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착안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이해인 시인은 꽃나무 옆에서 활짝 피기 전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꽃나무와 함께 기쁨의 잔기침을 하면서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면우 시인의 솔직한 노래 임금인상은 수입이 지출보다 적어 때로는 불안해 하는 나에게 한아름 선물같이 여겨진다. 아침 일찍 산길 십리쯤 걸어 일터에 도착하는 그는 건강관리비 10만원의 임금이 인상된 것으로 여긴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 공부 좀 도와주고 자녀교육비 10만원 인상되었고 구내식당에서 보일러를 고쳐준 뒤 점심을 제공 받으니 식대 5만원이 인상된 것으로 여긴다. 나도 이런 식으로 내 임금을 인상해 볼 방법은 없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박후기 시인으로부터 애송하는 시 두 편을 소개 받았는데 강은교 시인의 ‘풀잎’과 박남기 시인의 ‘새’이다. 나는 이렇듯 좋은 시를 오늘도 선물로 받았다. 가슴에 새기면 시집 두 편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언젠가 떠나야 하는 자신임을 생각하는 지혜를 선물로 받았고, 한마리의 새조차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 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 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 새 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지구(地球)를 끌어안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수준기(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썩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사랑의 물리학-상대성 원리/박후기>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내가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 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폐광/박후기>
아버지, 검은 입 벌린 채 눈 감았다
나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진달래꽃보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 다리가
녹슨 레일처럼 구부러지지 않게 두 팔로 힘껏 무릎을 눌렀다
막장은 벽만 있을 뿐, 바닥이 없었다
발밑을 파내려가도 눈앞엔 검은 벽, 바닥은 어느새 궁륭*이 되었다
아버지는 앞만 보고 살았지만, 언제나 뒤가 무너졌다
나는 페치카 옆의 카나리아, 연탄가스를 마시며 놀았다
구멍보다 틈이 무섭다는 것을 나는 안다
죽음의 生家가 텅 비어있다
*궁륭:활이나 무지개 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형상. 또는 그렇게 만든 천장이나 지붕.
(시인 박후기는 별로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을 글로 쓰는 것 아니냐 싶게 말을 아낀다. 문: 시를 이루는 건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 이른바 3다, 많은 독서? 많은 사색? 많은 창작…이라고들 하는데. 답: 생활 속에서 문득 튀어나오는 거, 자연 발생적인 거… 생활 속에 시의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잡히는 실마리 속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봄이 오는 소리/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게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유리창을 맑게 닭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임금 인상/이면우>
여섯 자리 자동차 번호판 중 어떤 건
등 서늘해지도록 몇년째 내 임금과 닮았다 그러나
체념을 모르는 나는 스스로 임금인상을 결행한다
아침 일찍 출발해 산길 십리쯤 걸어 출근하고 건강관리비 십만원
돌아와 초등학교 오학년 아이 학습 도와주고 자녀교육비 십만원
구내식당 보일러 손봐주고 점심 제공 받으니 식대 오만원
누가 일년 단위 계약직 보일러공의 임금을 물어오면 짐짓 그렇게
상기 금액을 덧붙여보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쉰이 되었다/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으론 낼, 모래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뜻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대설(大雪)날/황동규>
-故 김현에게
겨울하고도 흐린 날
눈도 제대로 내리지 않고
눈송이 몇 공중에 날려놓고 바람만 불다 말다 하는 날
이 식은 지구 껍질에 미열(微熱)이나마 심을 것은
그래도 버섯구름이 아니라
알맞게 거냉(去冷)한 술 한 잔이라면
오늘 양평 네 잠들어 있는 곳에 가
찬 소주 대신
가슴에 품고 온 인간 체온의 청주 한 잔 땅에 붓노니
그 땅이 네 무덤이건
우리 자주 들른 ‘반포 치킨’이건
그냥 지나쳐버린 어슬엇슬 산천이건
작정한 듯 검푸른 하늘
바람이 눈송이 하나 무덤 위에 띄워놓고
술 방금 받은 부운 위(胃)처럼 한번 부르르 몸을 떤다
<강/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이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인성의 소설 제목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차용
<갈대로 서서/공광규>
세상에 갈대로 서서
한번 흐느껴보자
누가 더 섦고 애통한지
옆 갈대와 슬픔의 키도 대보자
바람 심한 날이면
같이 부둥켜 안고 울다가
저기 먼저 바람에 꺾여
강물에 실려가는 갈대가 보이거든
잘가라 손 흔들자
내가 먼저 꺾여 실려가도
미련 없이 떠나자
먼저 떠날수록
더 넓은 평원에 먼저 닿으리
<풀잎/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 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강은교 시인의 허무집에 실린 시. 허무집이 처음 발행된 시기는 1971년이다. 이후 허무집에 실린 시들과 다른 시들을 묶어 민음사에서 풀잎이란 제목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2006년에 서정시학에서 출판한 '허무집’도 있다)
<새/박남수>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태양] 1959. 행복이나 순수, 사랑과 같은 고귀한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을 겨냥하고 있다면 한 덩이 납과 같은 차가운 물질을 사용해서는 어림도 없다. 노 시인이 피에 젖은 새를 손에 들고 이래도 모르겠느냐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시인 박남수(1918~1994)는 1975년부터 약 20년 뉴저지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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