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팔 년 전 그러니까 1994년 어느 겨울의 일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토론토에서 얼마 동안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아내는 당연히 따라나서겠다고 일치감치 동의를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문제였다. 두 딸은 당시 일곱 살과 네 살이었다.
아이들에게 우리 가족이 캐나다 토론토로 이사해서 살아볼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큰아이가 동생과 의논해 보고 이야기해주겠다고 했다. 하루가 지난 후 큰아이는 동생과 의논해 보았는데 가지 않겠다고 자신들의 결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유는 캐나다에 가면 머리카락이 노랗게 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침 아이들은 레고 놀이에 푹 빠져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레고로 만든 인형의 집을 선물하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이사를 해도 머리카락이 노랗게 변할 리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캐나다로 가면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의 집과 같은 멋지고 예쁜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예쁜 집에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귀가 솔깃해진 듯하였다.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사이 몇 가지 미끼를 더 던졌다. 너희들이 캐나다로 가면 한국말뿐 아니라 영어도 잘하게 되어 많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고 좋아하는 켄터키 치킨도 더 자주 먹게 될 것이라는 등.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 가족은 1995년 2월 21일 토론토에 도착했다. 부모형제 곁을 떠나 일가친척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낳선 곳에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용감무쌍하게도 말이다.
막상 토론토에 도착한 후 우리는 인형의 집 같은 멋진 집이 아닌 낡고 오래된 월세 아파트에서 십 년을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을뿐더러 가져간 돈은 일 년이 지나자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살던 아파트 부엌에는 바퀴 발레가 수시로 나왔고 거실에서는 가끔 쥐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용돈 한번 넉넉하게 줘 본 적도 없었다.
고맙게도 자녀들은 왜 멋지고 예쁜 집에 살게 해주지 않느냐는 불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통이 좋고 지내기 편한 영과 핀치 지역에 살게 해 준 것을 고마워하였다.
최근 큰딸이 캐나다 온타리오주 포트 이리에서 미국 뉴욕주 버펄로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는 날 딸과 사위가 마련한 집에 처음으로 가 보았다. 자신들이 직접 찾은 집이고, 거의 자신들의 능력으로 마련한 집이라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옆에 있던 아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예전에 딸들에게 캐나다로 이사 가면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멋지고 예쁜 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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