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2월 17일자에 실린 글을 함께 나눈다.
[나민애 시가 깃든 삶]〈377〉
<첫눈/이윤학>
여자는 털실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고 스테인리스 대야에 파김치를 버무린다.
스테인리스 대야에 꽃소금 간이 맞게 내려앉는다.
일일이 감아서 묶이는 파김치.
척척 얹어 햅쌀밥 한 공기 배 터지게 먹이고픈 사람아.
내 마음속 환호는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
이윤학(1965∼)
눈이 오면 어른들은 기쁘지 않다. 대신 오만가지 복잡한 심정이 든다. 올해도 지나가는구나 착잡한 마음이 들고, 내일 출근길은 어쩌나 빙판도 걱정하게 된다. 펑펑 함박눈이 내리면 이러다 집에 못 가는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 오도 가도 못하게 눈 속에 갇혀 세상과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눈이 오면 아이는 기쁜 마음으로 느리게 걷지만, 어른은 여러 가지 마음으로 느리게 걷게 된다.
눈에 대한 수많은 마음과 반응과 풍경이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참 특이한 것을 소개하려고 한다. 제목은 첫눈인데, 본문에는 눈은커녕 작은 눈송이 하나 안 보인다. 대신 커다란 대야에 파김치를 담그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혼자 먹으려고 담그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먹이려고 만든다. 그 누군가가 파김치를 좋아하는 건 분명하다.
그럼 대체 눈은 어디 있을까. 눈은 시에 나오지 않은 창밖에 내리고 있어야 한다. 첫눈이 오면 당신이 생각나고, 당신이 생각나서 파김치를 무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요리는 당신 때문이면서 또한 첫눈 때문이기도 하다. 눈이 펑펑 오는 날 생각나는 사람, 배불리 먹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우리는 다들 알고 있다. 이 시를 보면 이것저것 걱정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고 눈이 올 때 파김치와 당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앉아 좋아하는 것을 먹고 싶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 나민애 문학평론가/ 동아일보 2022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