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백석, 김종삼, 도종환)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1. 19. 06:42

<흰 바람 벽이 있어/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장편(掌編)2/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십 전(錢) 균일상(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 생일이라고
십전(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겨울나기/도종환>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 주려고
고갯 마루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겨을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이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 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일요일 아침/도종환>
지금부터입니다. 지금 죽지 않고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라도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새로울 수 있습니까. 마늘 순이 쓱쑥 솟는 햇빛 좋은 밭가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일요일 아침

<일요일/도종환>
바쁘다고 늦게 자고 게을러서 늦게 깨는 아빠의 늦은 아침 밥상머리 우리 아가 매달려 칭얼칭얼 대다가 두부 한 쪽 입에 물고 나풀나풀 갑니다 병아리처럼 마당을 한두 바퀴 돌다와선 동치미 하나 물고 콩당콩당 갑니다

<저녁비/도종환>
와거미 솔잎 사이 제 집에 급히 오르고 저녁 구름 너머로 초승달은 날락들락 길이 멀은 저녁새 날개짓 바쁜데 머리꼭지 적시는 빗방울은 오락가락 비를 비를 그을 마을은 얼마나 남았는가 천리를 걸어도 앞길은 캄캄

<산길 십 리/도종환>
눈 밟으며 혼자 넘는 산길 십 리 이 길로 이대로 깊어지고 싶어서 아래로 몸을 내리는 낙엽송 사이에서 돌아가기 싫어서 돌아가기 싫어서 풍경소리에 혼자 어는 산길 십 리

<동백 피는 날/도종환>
허공에 진눈깨비 치는 날에도 동백꽃으로 붉게 피어 아름답구나 눈비 오는 저 하늘에 길이 없어도 길을 내어 돌아오는 새들 있으리니 살아 생전 뜻한 일 못다 이루고 그대 앞길 눈보라 가득하여도 동백 한 송이는 가슴에 품어 가시라 다시 올 꽃 한 송이 품어 가시라

<가을날/도종환>
딸아이 손을 잡고 성당에서 오는 길 가을 바람 불어서 눈물납니다 담 밑에 채송화 오손도손 피었는데 함께 부른 노래 한 줄 눈물납니다

<책꽃이를 치우며/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꽃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 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 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늦깍이/도종환>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 때문에 고통은 깊어 갑니다 이별이 온 뒤에야 사랑을 알고 사랑하면서 외로움은 깊어 갑니다 죽음을 겪은 뒤 삶의 뜻 알 것같아 고개 드니 죽음이 성큼 다가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짦은 동안 잃지 않고 얻는 것은 없으며 최후엔 또 그것마저 버리게 됩니다

<겨울강/정호승>
꽝꽝 언 겨울강이
왜 밤마다 쩡쩡 울음소리를 내는지
너희는 아느냐

별들도 잠들지 못하고
왜 끝내는 겨울강을 따라
울고야 마는지
너희는 아느냐

산 채로 인간의 초고추장에
듬뿍 찍혀 먹힌
어린 빙어들이 너무 불쌍해

겨울강이 참다 참다 끝내는
터뜨린 울음인 줄을


<우리가 눈발이라면/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개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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