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K 권사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3. 11. 21:55

P 선배는 3월 9일(토요일) 저녁 노스욕에서 있은 연주회에 몇 사람을 태워 함께 가기로 하였다. P선배 내외는 K권사를 태우고 패신저 픽업으로 갔다. 핀치 패신저 픽업에서 기다리기로 한 다른 두 명을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는지 패신저 픽업에는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는 무척 난처했다. 정원이 다섯이라 여섯 명 모두를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K권사께서 다른 일이 있다며 슬그머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패신저 픽업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분이 무안해할까 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다렸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떠나기를 바라거나 다른 해결책을 찾으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에서 내린 K권사는 누군가 자신을 태우러 와달라고 부탁하거나 우버를 이용하여 집으로 되돌아갔으리라. 칠십 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했고 연주회 티켓을 양보했다.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며  조용히 행동으로 말했다.

<모과/정호승>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보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울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꺼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주)창비 刊, 창비시선 482, 2022 중에서


<저녁이 올 때/문태준>
내가 들어서는 여기는
옛 석굴의 내부 같아요

나는 희미해져요
나는 사라져요

나는 풀벌레 무리 속에
나는 모래알, 잎새
나는 이제 구름, 애가(슬플哀노래歌), 빗방울

산 그림자가 물가의 물처럼 움직여요

나무의 한 가지 한 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어요
새들은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가며 날아 앉아요

새들이 날아가도록 허공은 왼쪽을 크게 비워 놓았어요

모두가
흐르는 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서쪽 하늘로 가는 돛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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