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잊지 못할 선생님(고승만,이순섭)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5. 3. 22:43

본 시니어 대학에서 강의해 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분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가자들은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고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글쓰기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글의 내용이 좋아졌고 읽기와 쓰기의 재미를 알아가시는 듯하였다.
안타깝게도 팬데믹 기간에는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3~4년 공백 기간 중 함께했던 몇 분이 세상을 떠났다. 특별히 고승만 선생님이 잊히지 않는다. 팬데믹 기간 중이라 문병도, 문상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아쉽고 서운했다. 고승만 선생님은 글쓰기 반을 처음 만들고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하신 분인데 외롭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셨다는 생각을 하면 안타깝다. 할아버지는 내게 한소(閑素)라는 아호를 지어주신 분이기도 하다. 자필로 써주신 메모를 지갑 속에 넣고 다닌다. 유쾌하시던 모습과 주변 사람들을 웃게 하시던 농담이 그립다. 그나마 102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점은 큰 위안이다.
고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가장 연세가 높으신 어른은 이순섭 할머니이시다. 이순섭 할머니의 89세 생신이 지난 주간 있었기에 어제 수업 시간 조촐한 생일 파티를 열어드렸다. 케이크를 준비하여 초를 꽂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함께 축하했고 디저트로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기뻐하시는 모습이 연상 수줍게 핀 수선화요 흐드러게 핀 벚꽃이었다.

이순섭 선생님께서 쓰신 글이다.

<나이 바퀴/이순섭>
생명력을 중심으로 둥글게 밖으로 밖으로
지경을 넓혀 일 년에 한 줄씩 늘어가는
보이지 않는 고목 속의 비밀
죽어야만 드러나는 나이테처럼
늙어 갈수록 연륜을 만들어 가는
나의 나이테는 어떤 모양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
뚜껑이 열리는 그날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나이테를 만들고 싶다


<봄을 잃은 4월의 어느 날/이순섭>
그 이름도 생소한 보이지 않는 정체 코로나19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와 우리 삶을 위협하네
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하나 된 가정을
이산가족으로 떼어 놓고 사랑 고파 정 고파 하는
메마른 가슴을 무엇으로 달래 주고 채워 줄까

웃고 울며 허물없이 함께하던 그리운 친구들
혹시나?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남은 날을 계수하며 세월에 떠밀려
오늘도 별수 없는 흰머리 친구들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 애타는 마음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소리 없이 다가와 희망을 꿈꾸게 하던 봄
흉악한 바이러스에 가리어 활력을 잃었는가
기다리는 마음 알아챘나 느린 걸음으로 어슬렁
늦었지만 봄이라고 피어나는 꽃봉오리 환한 미소
닫혔던 내 마음도 밝은 미소 짓게 하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불안한 현실 속에서
일을 잃고 활력을 잃고 삶의 봄을 기다리네
망연자실 어두움뿐 밝은 날은 안 보이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안타까움에서 기쁨으로
언젠가는 찾아올 봄을 상상하며 학수고대 기다리네

정체도 모를 바이러스에 잡혀 신음하는 이웃
격리되어 당하는 외로움 무슨 말로 위로할까
힘없이 삶의 끈을 놓아야 하는 그 고통 누가 대신할까
이별의 슬픔 억제할 수 없는 오열 위의 허무함
영원히 사는 그 세계로 재회의 기쁨을 소망한다


<길/이순섭>
길! 하면 어렸을 적 추억이 새롭다. 매일 같이 2km 이상 걸어서 학교에 다녔던 길 겨우 마차 하나 다닐 수 있는 비포장도로였다. 유일한 넓은 길이었다. 학교에 가는 그 길은 몇 번을 구부러져 돌아야 했고 몇 번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기찻길도 건너야 했고 징검다리 냇길도 건너야 했다.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고 정겨웠던 길, 그때를 더듬어 보니 눈에 선하고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떠오른다.
아침이면 지각할 세라 떼를 지어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한 시간 길이다. 하교길에는 동무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들판을 지나 야산을 거쳐 집으로 가는 길이 즐거운 놀이터였다. 하루하루 등하교 길이 육 학년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눈녹고 따뜻한 봄이 오면 야산에 각종 꽃이 우리들을 반겨주고 여름 가을 동안에는 놀잇감도 많고 먹을 것도 다양하였다. 풀잎 따서 풀피리도 만들어 불어보고 크로바 꽃으로 꽃반지도 만들어 끼고 풀 테 안경도 만들어 안경이라고 눈에 끼고 꽃을 따서 머리에 꽃아 보고 누가 더 예쁘냐고 자랑도 하고 소나무 송진을 따서 껌이라고 씹어도 보고 꽃다발을 한 아름 만들어다가 병에 꽃아 집안을 환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진달래 꽃을 따먹기도 하고 살맛 나는 싱아도 뜯어먹고 산딸기를 비롯해서 각종 열매로 시장기를 채우곤 했다.
장마철에는 물이 범람해서 길이 끊기면 돌아서 가야 했고 우산도 귀한 시대라 비를 다 맞으며 젖은 몸으로 덜덜 떨면서 집에 오기도 했다. 그때는 왜정 말기이자 2차 대전이 치열하던 때라 농촌이 가난하였다. 때문에 겨울에 외투하나 없었다. 운동화도 없이 검은 고무신이 유일하게 발을 보호해 주는 신이어다. 북풍한설 눈보라 칠 때는 얼마나 추웠는지 장갑도 없이 손이 꽁꽁 얼어 동상에 걸리면서도 매일 같이 그 길을 걸어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큰 즐거움이었다.
전쟁말기라 툭하면 미국의 B29 비행기가 검은 연기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며 ‘샤아앙~~’하는 굉음을 내면서 떠갔다. ‘타당탕’ 공포인지 진짜인지 총소리가 나면 논둑이나 산으로 뛰어가 나무 숲으로 숨었다. 잘못하면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웅크리고 숨어 떨었다.
어린 시절 그 길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면소재지에 볼 일이 있든지 곡식을 가지고 나가 팔아 생필품을 사야 하는 오일장 보러 가는 길,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기차를 타기 위해 걸어야 했던 익숙했던 유일한 길, 목적을 향해 서성여야 하는 모든 이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먼지 나는 황톳길이었다.
우리나라에 큰 불행을 안겨주었던 6.25 전쟁으로 3주 만에 중학생의 학업이 좌절 됐던 길, 기차통학을 위해 새벽으로 밤으로 통학을 위해 걷고 뛰었던 그 길, 꿈에 벅차기도, 아쉬움에 쓰린 가슴을 안았던 추억이 깃들어 있던 그 길. 그 길은 학구열이 강했던 그 시절에 나의 꿈이 좌절되고 공부 못한 한을 품고 살아가야 할 내 인생을 예측이나 했을까?
스무 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유일하게 면소재지에 있던 교회를 그 길을 통해 왕래하며 신앙을 키워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달밤이 아니면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초저녁, 길 양쪽이 산으로 벽을 이룬 골목과 같은 길을 열심히 걷던 중 뒤에서 한 남자가 두 사람을 덮치는 바람에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던 기억이 새롭다. 다행히 흉한 일은 안 당했지만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던지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 기억으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결혼해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성장했던 고향길, 지금 돌이켜 보니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겹겹이 쌓여있다. 한 장면 한 장면 꺼내보면 꿈을 꾸는 것 같다.
우리 인생살이 목적을 향해 한 걸음씩 안내해 주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길은 어디로든지 통해있고 뚫려있다.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는 길은 좁은 길이든 넓은 길이든 험한 길이든 평탄한 길이든 돌아 돌아서든 갈 수 있다. 반면 보이지 않는 인생길은 아득해 보이고 막연해 보이고 잘 가다가도 꽉 막힐 때가 있고 험한 길을 만나 헤매고 방황하고 좌절할 때가 많다. 이 길을 뚫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밝은 길을 만나려면 강한 의지력과 용기와 인내력과 신앙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쉽게 실망하지 않고 오뚝이와 같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보이는 현상의 길은 안내받아 갈 수 있는 이정표가 군데군데 있어 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 안심할 수 있다.
어김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따라 걸아가는 인생길은 때때로 별빛도 없이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목적지를 향하여 가다가 험한 풍랑을 만난 일엽편주와 같을 때도 있다. 망망대해에서 노를 젓는 것과 같은 막막함을 경험할 때도 있다. 백 년도 못하는 인생길이 왜 그리 험난한지. 지상의 길에 이정표가 있듯이 우리 인생길도 건널 수 있는 길이 있고 뚫고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인간은 모르고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만물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인생길에 이정표가 되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힘들 때마다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참된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는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끝없이 뚫려있는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 마침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만나게 된다. 그 길로 한 걸음씩~~~


<잊지 못할 선생님/이순섭>
나는 일제 강점기 이 차 대전이 치열했던 가난한 시절 시골 농촌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압박 속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고 비참하게 살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삼 학년 때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말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사 학년 때부터 존경하는 은사를 만나 육 학년 졸업 때까지 선생님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좋은 인성과 지성과 감성과 삶의 지혜까지 배우며 자랐다.
선생님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처음으로 부임한 우리보다 열 살 위인 총각 선생님이셨다. 이름은 오흥섭, 코가 크다고 해서 코주부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다방면으로 조예가 깊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후진 교육에만 열중했던 감성적이면서도 엄한 선생님이셨다.
특히 예능에 재능이 남달라서 학생들의 잠재된 재능을 발굴해서 그 재능을 키워주고 각자 잘하는 부분을 칭찬해 주고 키워 주셨다. 음악 시간에는 많은 동요와 아직 어리지만 여러 가곡을 배우게 했다. 왜정의 핍박으로 마음에 한을 품고 애수에 찬 노래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부르던 노래와 고향을 그리는 노래가 많았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깊어가는 가을밤에’, ‘성불사의 밤’, ‘고향 생각’, ‘황성 옛터’, ‘뜸북 뜸북새’, ‘고향 생각’, ‘마의태자’ 그 외에도 많은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리울 때는 옛 노래들을 콧노래로 흥얼거리게 된다.
작문을 잘하는 학생은 지은 글을 읽게 하고 자신감과 꿈을 갖게 했다. 그러므로 그 학생은 그 재능을 키워서 지금까지도 수필을 쓰고 있다. 노래를 잘하는 애는 늘 독창을 시켜서 성악적 재능을 키워주셨다. 그 밖에 수학을 잘하는 친구는 그쪽으로 전공해서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했다. 체육을 잘하는 친구는 운동회 때는 선수로 뛰곤 했다, 각자 특기를 키워주어 그 재능을 따라갈 수 있게 도와주는 폭넓고 색다른 교육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셨다. 육 학년까지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따라 감수성이 예민하고 총명한 어린 시절을 잘 보내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림 그리기와 붓글씨 쓰는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과 붓글씨는 반 게시판에 붙여지는 영광을 누렸고 도내 어린이 미술 전람회에도 붓글씨 시조 한 편을 써서 출품했던 기억도 난다.
우리 고향은 농촌이라(지금은 일산 신도시가 되었지만) 중학교에 가는 학생은 반에서 반도 안 되었다. 그 고장은 면 소재지의 작은 도시라 중학교가 없어서 경의선 열차로 서울까지 기차 통학을 해야 했다.
과외공부라는 말이 생소했던 그 시대에 중학교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을 모아 방과 후에 따로 공부를 시켰다. 매일 시험을 보는데 성적이 안 좋으면 복도에 일렬로 서서 걸상을 들고 단체 기합을 서야 헸고 공부 잘하던 학생이 어쩌다 시험 점수가 떨어지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는데 정강이에 피멍이 들도록 맞아야 했다.
공부가 끝나고 캄캄한 밤에 2Km가 넘는 시골길을 걷노라면 무섭기만 했다. 양편이 산으로 벽을 이룬 길을 걸으면 산속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머리끝이 쭈뼛 서며 가슴이 철렁하여 걸음을 멈추곤 하였다.
선생님께서 정말 열심히 잘 가르쳐 주신 결과 육 학년이 두 반이었는데 우리 반에서는 서울에 가서 거의 다 중학교에 입학했고 여러 명이 일류 중학교에 합격해서 전교에 기쁨과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때 마음 졸였던 일이 또 하나 기억난다. 학기 말만 되면 남학생 두 명과 여학생 두 명을 남게 해서 학생들의 성적을 통계 내는 일을 시켰다. 그럴 때마다 서로가 눈치를 보며 이번에는 내 성적이 어떻게 나올까, 누가 일 등을 차지할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마음 졸였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을 뵈면 늘 존경스러웠다.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가치 있어 보였다. 어린 마음에 나도 후일 공부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육이오 사변으로 인해 꿈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바른 교육으로 일관했던 선생님 덕분에 좋은 가르침과 인도로 성장하여 모두가 훌륭한 사회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즐거웠고 행복했던 그 시절은 지나간 추억으로만 마음에 살아 있다. 그리운 선생님과 같이 뛰놀던 친구들이 그립다. 보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미셀러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노래  (0) 2024.06.19
나이아가라에서  (0) 2024.04.30
늦은 때는 없다  (0) 2024.03.13
K 권사  (0) 2024.03.11
표지판  (0) 2024.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