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무현금(無絃琴)/박승민 외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7. 23. 22:19

<무현금(無絃琴)/박승민>
그러고도 한참을 더 숨을 고른 뒤에야 바람의 환부(患部)를 조심스레 눌러봅니다.

닿는다는 건 자주 바뀌는 당신 마음의 일생을 따라 걷는 일인데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가 마음까지도 모르겠네. 이젠 도통 모르겠네. 투덕거리며 자꾸 당신 쪽으로 귀를 조금 더 기대어놓는 일인데, 이쪽으로 되넘어오는 찌그러진 마음의 대야를 펴서 다시 전해보는 일인데…

이번에는 어떤 화성악도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수백 번을 꼬아서 만든 명주실의 소리들도 끊어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참아 내던 들숨의 현(악기할絃)이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고 허공을 끊고 터져나갈 때, 그 순간의 단심(丹心)만을 생각하며 다시 어두워지는 구름의 공명통 속으로 올려 보냅니다.

한생이란 답장이 오기엔 너무 짧은 거리, 어느 늙수구레한 어둠이 붉은 나뭇잎 사이로 빠져나갈 때, 더 어두워져 버린 낡은 귀를 이번에도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면서 잠시 열어두기는 하겠습니다.


<호미/안도현>
호미 한 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뻗지 못하고 안쪽으로만 날을 세우고

서너 평을 나는 농사라고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걸 나는 당최 알지 못했다
나는 호미 자루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을 틀어 돌려세우는 일에 종사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끔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상추밭이 푸르렀다는 것, 부추꽃이 오종종했다는 것은 오래 기억해 둘 일이다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다
날 끝으로 더 이상 뻗어나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참으면서

서리 내린 파밭에서 대파가 고개를 꺾는 입동 무렵

이 구부정한 도구로 못된 풀들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아이들을 키운 여자들이 있다
헛간 사랑에 얹힌 호미처럼 허리 구부리고 밥을 먹는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한소>
한 줄로 늘어선
포도나무는
푸르렀다

끝없이 이어지는 푸르름
지난겨울 앙상하던 가지에서 저렇듯
푸른 잎이 돋아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데릴 스테파닉이 65세를 맞던 해 세상을 떠나고
영결식이 끝난 후 식사한 와이너리 식당이 보였고
도로는 한적했다

커피점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서두르는 기색이란 없었다
천천히 걸었고 여유로웠다

신문도 한적하고 조용했다
1면에 한 남자가 연분홍 셔츠를 입고
홀인원 한 홀의 깃발을 잡고 웃는 사진이
실려있었다.  


<지금은 쉴 때입니다/정용철>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으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번 더 뒤돌아 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쉬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