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사랑의 전당(김승희) 외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8. 3. 00:21

<사랑의 전당/김승희>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던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천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오늘 하루/이상국>
막힌 배수구를 찾아 마당을 파자
집 지을 때 묻힌 스티로폼이 아직 제집처럼 누워 있다
사람만이 슬프다.

앞집 능소화는 유월에 시작해 추석 밑까지 피고 진다
립스틱 같은 관능이 뚝뚝 떨어진다
꽃도 지면 쓰레기일 뿐.

유럽의 길바닥에는
시리아 난민들이 양떼처럼 몰려다니고
폐지 줍는 노인이 인공위성처럼 골목을 돈다.
누가 옳든 죽든 지구는 아무 생각이 없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폐지 값을 대폭 인상할 것이다.
지구도 원래는 우주의 쓰레기였다.

대낮에 모슨 음모라도 하는지
동네 개들이 대가리를 주억거리며 골목을 돌아다닌다
저것들은 여름을 조심해야 되는데
반세기가 넘게 평화가 계속되는데도
누가 또 별을 달았다고 거리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나는 벌써 오래전에 시인이 되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모른다.


<버펄로 파네라(Panera Bread)에서>
팔십 대 중반 구십에 가까운 할머니들이  파네라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자주 만나는 사이인 가 보다. 세 명 모두 밝은 색 옷을 입었고 얼굴이 곱다. 햇볕에 그을린 구석이라고는 없고 삶에 찌든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동년배이신 어머님 모습이 스친다. 어머님은 동네 경로당에 다니곤 하셨는데 거기서 만나는 친구들은 주로 화투를 치며 논다고 하셨다. 미국의 변방 뉴욕주 버펄로에서는 할머니들이 운전을 하고 파네라에 모여 차를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 버펄로는 빌딩들로 숲을 이룬 도회지 느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시골 같은 모습도 아니다. 한국의 중소도시 같다고나 할까.
파네라는 커피 한 잔에 4500원 정도로 한국과 비슷하다.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는 점이 한국의 커피점과 다르다면 다를까? 어쩌면 요즈음 한국에서도 무한 리필을 해주는 커피점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토론토에서는 팀 호튼 커피 중간 사이즈가 2000원가량이고 맥도널드 커피는 1500원가량이니 토론토와 버펄로의 커피값을 비교하면 버펄로가 비싼 편이다. 지금은 오전 10시 30분. 파네라에는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사람들, 모닝커피를 마시러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다소 부촌에 속한 지역이라 그런지 사람들 얼굴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 든 사람이  많다. 젊은이들은 이미 자신의 일터에서 일하고 있을 터. 어쩌면 은퇴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 2024년 8월 2일 금요일 버펄로 파네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