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후회/정호승>
누나
엄마가 오늘 밤을 넘기시긴 어려울 것 같아
그래도 아직 몇 시간은 더 계실 것 같아
봄을 기다리는 초저녁 여섯 시
내가 뭘 안다고
인간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내가 뭘 안다고
여든이 다 된 누나한테
누나
작업실에 좀 다녀올 게
급하게 보내야 할 메일이 있어
금방 올 게
오늘 밤은 엄마 곁에 계속 있어야 하니까
누나는 말없이 나를 보내고
나는 어머니의 집을 나서 학여울역에서 대청역까지
어머니가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에
한 정거장 지하철을 타고
작업실로 가 메일을 보내다가
갑자기 노트북 자판기에 커피를 쏟듯 마음이 쏟아져
지금 이 순간 혹시 엄마가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서둘러 지하철 계단을 뛰어내리는데
호승아 지금 오니
누나의 짧고 차분한 전화 목소리
네 지하철 탔어요 금방 가요
다급히 돌아와 아파트 문을 열자
엄마 돌아가셨다
누나가 덤덤히 잘 갔다 왔느냐고 인사하듯 말한다
미안해요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사랑해요 엄마
빰을 비비며
어머니 임종을 지키려고 급히 다녀왔는데
기다려주시지도 않고
영원히 기다려주시지도 않고
봄을 기다리던 어두운 저녁 일곱 시
*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중에서
부모님 임종을 지키지 못할까 염려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나는 아버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에 앉아 있을 시간 눈을 감으셨다. 구십을 넘기신 어머니 몇 년 더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시면 얼마나 좋을까. 해외에 나와 있으니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여 속 앓이 할 때가 잦다.
<낮게 부는 바람/유혜빈>
그건 정말이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잠들도록
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일이야
늦은 여름 아침에 누워
새벽을 홀딱 적신 뒤에야
스르르 잠들고자 할 때
너의 소원대로 스르르
잠들 수 있게 되는 날에는
저 먼 곳에서
너는 잠깐 잊어버리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너를 잠들게 하는 것이라는 걸
멀리서 너의 이마를 아주 오래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아무래도 너는 모르는 게 좋겠지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 속에서], 창비, 2022
<리얼리티/전욱진>
시간을 여행한다
영화에서 그랬다
앉아있는 나는 저렇게
먼저 다녀온 다음에
말해줄 수 없겠지
미래의 불행을 막으려고
사랑하는 이의 생명을 지키려고
눈에 보이는 선한 의지까지도
여기 앉은 나한테는 없는 것
이미 일어난 일의 주변을 서성이며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그래
회상을 통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끝내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고
가장 긴요한 역할을 수행해 낸
한 사람의 내레이션이 들리고
그렇게 이 모든 일은 과거가 되어간다
화면 밖으로 영화가 길게 이어진다면
그들은 이미 추억이라 부를지 모른다
이게 벌써 십 년 전이구나
같은 영화를 열 번쯤 보는 나는
플레시백이라는 기교를 부려본다
과거를 다시 돌보마
현재를 돕고 싶지만
감정의 고저는 이제 없어
눈 감고 누우면 그래도 잠이 왔다
지키지 못한 것을 지켜내는 것은
꿈에서나 그랬고
'문학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킷 리스트 (8) | 2024.10.01 |
---|---|
아침에 시 한 편(보석/박철 외) (1) | 2024.09.28 |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신동호) (2) | 2024.08.22 |
토요일에도 일해요(유현아) 외 (0) | 2024.08.21 |
새와 한그루 탱자나무가 있는집(문태준)외 (0) | 2024.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