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아침에 시 한 편(보석/박철 외)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24. 9. 28. 01:59

<보석/박철>
싼 것이 편한 인생이 있다 팬티도 양말도 런닝구도
싼 것을 걸쳐야 맘이 편한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산 운동화를 사골 고듯 신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보석처럼 지키는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 싼 것을 걸침으로써 그들에게
밸런스를 맞추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하나씩은 있다
지금 나의 남루 속에
천금같이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청노새 눈망울처럼 절실한 그리움의 보석은 무엔가
무엔가 말이다
어젠는 분명 긴 봄밤이었는데
오늘 잠을 깨니 단풍 이는 가을 새벽이었다
짧은 꿈속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묽은 떨림
일장춘몽 속에 나 진정 세상 모두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겐 세상 하나가 반짝이는 옥빛 구슬이었다
한없이 걸어들어가는 구슬문이었다
사랑은 덧없이 싼 가을 낙엽이었으나 나
오늘도 보석 같은 단 하나의 사랑을 따라간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수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생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컵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 샀다0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세 시에 흰 눈이 내리네/박철>
흰 눈이 내린다
마당 가득 흰 눈이 내린다
누군 희말라야에 가서 초라한 너를 발견하였다는데
네시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는 길
차마 흰 눈 위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마당가에 섰다가 거대한 나를 보았다
함박꽃이 되어 내리는 올해의 첫눈
너를 찾든 나를 잃든 오늘은 비긴 날로 하자
그러니 우린 하나다
지금이라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면
함박꽃 한 술 떠 서로 먹여주며
아프게 살아온 지난 여름은 잊도록 하자
그래 그러라고
세시가 지나는데 흰 눈이 내린다


<맞바람 아궁이에 솔가지 넣으며/박철>
청솔가지 긁어 넣으며 서울은 너무 혼잡한 것 같아요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맞바람 아궁이에 앉아
갑자기 누구라도 찾아올 것 같은 해거름
솔가지 밀어 넣으며
당신은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젖은 연기 내게로 밀려오는
맞바람 아궁이에 청솔가지 넣으면
눈물이 나네


<섬잣나무/박철>
28년 전,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아팠다 그리하여 나만 아프고 나면 외롭고 나면 외면당하고 나면 나만 가슴이 텅 비어 있었고 나만 조금씩 늙어갔다

30년이 지난 지금, 벌써 시가 지겨운 지금도 나만 아프고 나만 서럽고 나만 홀로 밤길을 걷고 나만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나만 빠르게 늙어간다

아,
어느날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오엽송 늙지 않는다

30년이 더 지난다 해도 나는 나다
나는 모를 것이다
아무도 아프고 나무도 슬프고 나무도 때로 별빛처럼 빛나고 싶고 나무도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립고 나무도 누군가를 때려주고 싶고 아,

오엽송
섬잣나무도 저렇게 파도를 잊고
육지에서 저렇게
늙어간다는 것을


<격정의 세월/박철>
격정은 사라지고
나는 긴긴 잠을 자누나
격정은 사라지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피해 하나 둘
놀이터로 나온다
장기판을 놓고 차를 먹고 포를 떼고
졸들처럼 앉아 낮술을 마신다
격정은 사라지고 사랑은 가고
아이들이 버리고 간 그네에 앉아
흔들리는 것은 이것만이 아닐지니
언젠가 다시 올까 격정의 세월
쇠줄을 잡고 생명줄을 잡고
마지막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
차마 멀리 흐려지는
빛 고운 이마


<산촌/박철>
오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나
새롭지 않다
이제 죽음이나 사랑이나 다 느끼하다
벗겨도 볏겨도 지워지지 않던 향기
그 속쓰린 사랑과 죽음을 생각하며
산을 넘는다
지세로 보아 까투리 한 마리 살 것 같지 않은
골짝에 연기가 오른다
산촌이다 두어 가구
도시에서 밀려와 숨어 사는 사람이 있구나
부러진 가지 일으켜 세우고
버섯 곰팡이에 물을 뿌리는
산촌에도 해가 지는 가을 저녁
물소리가 곱다


<연/박철>
끈이 있으니 연이다

묶여 있으므로 훨훨 날수 있으며
줄도 손길도 없으며
한낱 종잇장에 불과하리

눈물이 있으니 사랑이다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며
내가 있으니 네가 있는 것이다

날아라 훨훨
외로운 들길, 너는 이길로 나는 저 길로
멀리 날아 그리움에 지쳐
다시 한 번
돌아올 때까지


<버리긴 아깝고/박철>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 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 받으며


<그대에게 물 한잔/박철>
우리가 기쁜 일이 한두가지이겠냐마는
그중의 제일은
맑은 물 한잔 마시는 일
맑은 물 한잔 따라주는 일
그리고 당신의 얼굴을 바로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