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rifice·시니어

아름다운 하산 길(따온 글)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6. 7. 4. 16:18

<아름다운 하산길>

 

벤저민 프랭클린은 어딜 가나 수첩을 들고 다녔다. 절제·침묵·규율·근면·겸손. 지켜야 할 13가지 덕목을 써놓고 매일 얼마나 실천했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그가 수첩으로 해낸 50년 자기 관리를 200년 뒤 되살린 상품이 일기형 수첩 프랭클린 계획장(planner)이다. 리더십·자기 계발 교육사업으로도 이름난 수첩회사 프랭클린 코비가 내세우는 경구(警句)가 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시급하되 소중하지 않은 일만 하느라, 시급하진 않아도 소중한 일은 못하고 산다.

 

미국 작가 애비게일 트레포드는 은퇴 가이드북 마이타임에서 우리 삶을 오십 전과 오십 후로 나눴다. 쉰 살까지는 직장과 결혼, 자녀교육 같은 이런저런 책임과 부담에 매여 살지만, 쉰 넘어서는 그런 스트레스를 털고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시기라고 했다. 이 책이 히트하면서 50대부터 자기만의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마이타임족(族)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2년째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가 2년 뒤 사실상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2008년부터 회사 일에서 손을 떼고 자선사업에만 힘을 쏟겠다고 했다. 지금 나이 50세 8개월. 마이타임족을 꿈꿔 왔는진 모르지만 세계 최고 회사를 남겨두고 물러나긴 너무 젊다. 먹고사는 일과 가족 부양의 길이 멀기만 한 우리네 50대들에겐 더욱 꿈 같은 일이다. 게이츠 부부가 부(富)를 사회에 되돌리겠다며 부부 이름을 따 & 멜린다 게이츠재단을 만든 게 2000년이다. 에이즈·말라리아 백신 개발을 지원하고 소수민족 보호를 비롯한 보건·교육사업을 주로 한다. 그간 부부가 재단에 내놓은 돈이 모두 288억달러, 30조원 가깝다. 재산의 절반 이상을 내놓은 셈이다. 그러고도 세 자녀에겐 재산의 5000분의 1, 1000만달러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선사업에 쓰겠다고 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그 꽃). 등산이건 인생이건 사람들은 정상을 향해 정신없이 기어오른다. 그러나 실상 중요한 것은 정상에 오른 다음이다. 돈도 벌 때가 중요할 것 같지만 벌고 난 뒤 어떻게 의미있게 쓰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갓 쉰에 인생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꾼 빌 게이츠. 더 값진 인생 2막(幕)을 향한 그의 하산길이 부럽기만 하다.

 

(만물상: 이준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50세 게이츠의 은퇴선언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