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ermination·청년

동아줄을 하나 더...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6. 21. 15:49

         "요즈음 사람들이 자꾸만 한강에 몸을 던져 물을 오염시킨다"는 우스개 소리를 듣고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내심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살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스스로 목숨까지 버릴까 함께 슬퍼하고 아쉬워하지는 못할 망정 "식수인 한강 물을 오염시킨다"는 농담은 시니컬한 표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농담이 나올 정도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여 가슴 아픕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확률로 따지자면 몇 백만분의 일이 된다고 하지요. 돈 때문에, 직장 때문에,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고, 하루 아침에 명예를 잃는 일, 얼토당토 않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죽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버리는 일은 인륜지사에 어긋나는 일이지요. 누구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한 두개쯤 가졌으면 하는 생각 간절합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승 박훈주(타계) 교수께서는 고등학교 시절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매달릴 수 있는 동아줄을 하나만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의 동아줄이 끊어지면 잡을 수 있는 다른 동아줄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 생을 살되 취미라든가, 친구라든가 종교라든가 하는 또 다른 가치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이셨지요. 아울러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세상없이 좋은 친구는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주의에 사람이 넘쳐 났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기에게 "여자친구가 많다”는 실없는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욕심 없이 소탈하고 솔직하여 가까이 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며 해맑게 었지요. 교육학을 전공한 이 친구는 축구 배구 수영 등 운동이라면 못하는 게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축구는 거의 선수급이었지요. 차범근 선수를 키워낸 장운수(작고)감독이 정식으로 선수생활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 올 정도였으니까요.

 

운동을 좋아하던 친구는 늦게 대학원에 입학하여 체육학을 전공했습니다. 이후 몇몇 대학에 강의도 나갔습니다. 체육과목을 담당한 친구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했고 교육학을 전공한데다 심리학까지 공부 했으니 제대로 무장을 한 셈이지요. 솔직담백한 생각과 행동 그리고 독특한 교수법은 강의실에 학생들이 차고 넘치게 했고, 실기 시간이면 교수와 학생이 하나가 되어 뛰고 달렸습니다.

 

사회사업가였던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던 친구는 IMF  직전에 사회복지 법인 설립을 한다며 사비를 털고, 금융기관에서 융자를 얻어 땅을 샀습니다. 도시에서 다소 떨어졌으나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노인들을 위한 멋진 사회복지시설을 만들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싼 돈주고 땅을 사긴 했는데 바로 IMF가 터진 것입니다. 갑자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땅값은 곤두박질 치고 금리는 올라가니 이자 만들어 대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IMF이후 지금까지 무려 6-7년이나 그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제도권 금융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이사람 저 사람에게 돈 빌리는 일도 한 두 번이지 돈 빌리는 일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돈을 갚지 않으면 담보해준 물건을 경매에 넘기겠다는 금융기관의 독촉은 친구에게 늘 비수와 같은 것이었지요. 돈 빌리려고 이곳 저곳 다니다 보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말이 쉽지 돈을 빌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대학에서 받는 강사료는 지방으로 뛰어 다니는데 드는 교통비나 용돈 정도였지 돈버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친구는 가끔 제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합니다. 야, 힘들어 죽겠다. 이게 사람 사는게 아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거냐. 내가 그래도 신앙심이 있으니 버티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오래 전에 정신병자가 되었든지 황천길로 갔을 거다. 친구야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자존심과 명예는 다 버렸다라고 말합니다. 친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전화하여 이렇게 하소연이라도 하면 마음이 좀 풀린다. 너는 내가 이렇게 하소연 할 때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면 되라고 말입니다.  스스로 힘들어 함을 인정하면서 위안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지요. 어떻게 해서건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 애처롭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구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반드시 다시 일어 서리라 믿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친하게 지내는 선배와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선배는 2년전 55세의 나이로 정년퇴직을 하고 본인이 투자한 외식산업체(음식점)에 관리자로 들어갔습니다. 전임관리자가 월급을 천만원 가량을 받고 있었는데 다소 미덥지 못한 부분이 있어 주주인 선배가 직접 관리인으로 앉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임관리자가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50대의 나이에 한창 정력적으로 일하고 멋진 노후를 설계할 나이에 자동차 안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버렸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스스로 식당을 경영하려고 5억 가량의 예산으로 경기도 어느 지역에 식당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5억으로 마무리 하려고 했던 일이 10억이 들어도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자꾸만 빛 독촉에 시달리자  나 혼자 감당하리라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지요.  

 

힘이 들 때 스스로 그 힘듬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안으로 쌓기만 하고 밖으로 분출 하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의외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거나, 한바탕 욕을 하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식물과 대화를 하거나, 하루 종일 걷는다거나, 신앙을 가져보는 것은 동아줄을 하나더 가지는 일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