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ermination·청년

기쁨의 눈물(피아노 협주곡 '황제')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6. 28. 09:58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년시절의 일이다. 막 클래식음악에 재미를 들였을 때 가까이 접하던 음악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괜스레 무드를 잡고싶다거나 음악이 듣고 싶어지면 반 클라이번이 연주하는 LP판 황제를 턴테이블에 올리곤 했다.

 

이 시절 레코드 가게에선 트윈 폴리오의 웨딩케익이 흘러 나왔고, 가수 김창완이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로 인기를 구가하였다. 그룹 아바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 했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는 김창완아바, 사이먼 & 가팡클 ,송골매의 노래를 즐겨 듣곤 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들었다. 어설픈 솜씨로 진토닉(진에 토닉 워터를 썩어 만든 각테일)을 만들어 마시며 곡에 빠져 들기도 했다.

 

자주 들렀던 음악 감상실 하이마아트.(당시 대구시 향촌동 소재, 마음의 고향이라는 다른 명칭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전면에 베토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어두운 조명과 출중한 음향이 클래식 음악을 듣기에 적합하던 곳. 이 곳 하이마아트에서도 피아노 협주곡 황제는 빠질 수 없는 단골 신청곡 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는 견디기 힘든 큰 시련을 겪었다. 늦깍이로 태어난 막내 여동생 미정이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한쪽 다리를 잃은 것이다. 사고는 당사자인 미정은 물론 가족전체에 엄청난 시련을 안겨 주었다. 하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 티없이 밝고 예쁘게만 자라던 막내의 다리가 없어진 것을 보면 며칠씩 잠도 오지 않았다. 동생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나는 동생의 아픔이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쓰리고 아팠다.

 

미정은 3개월에 걸친 입원치료를 마치고 퇴원을 했다. 집안 분위기는 어두웠고, 애써 감추긴 했으나 작은 충격에도 터질 것만 같은 분노와 슬픔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있었다. 이 때도 나는 틈만 나면 황제를 들었다. 왜 신(神)이 내 사랑하는 막내 동생에게, 아니 우리가족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하는 생각에 몸서리 쳐질 때 황제의 밝고 명쾌한 선율은 다소나마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황제는 당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선명함과 화려함을 지녔다. 2악장의 애절한 선율은 오히려 우리가 당한 슬픔을 잘 표현해 주는 듯 했다. 이어지는 3악장에서는 특유의 활달함이 되 살아나 가라앉은 기분을 돌이켜 주었다. 내가 이 곡을 좋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작곡자 베토벤이 들리지 않는 가운데서도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는 것일 게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성취. 주어진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불후의 명작을 남긴 베토벤처럼 나나 동생도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나리라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다리가 불편한 막내 동생이 집에서 숙제를 하거나 놀고 있을 때면 늘 황제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아홉 살이던 막내 동생은 지금 30대에 접어 들었다. 꾸준한 노력 끝에 중견음악인(바이올리니스트)이 되어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콘탁의 리더, 멜로스 앙상블, 글로리아 앙상블의 단원으로 왕성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주말(6월 25일 오후 7시 30분 대구오페라 하우스) 미정이가 제1바이올린 수석으로 있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의 연주를 들었다. 계명대학 이청행교수의 협연과 상임지휘자 박탕조르다니아의 지휘로 공연된 이날의 연주는 대체로 무난했다. 곡 자체가 연주하기에 크게 어려움이 없기도 하려니와 반주를 맞은 시향의 연주는 협연자를 감싸주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휘자의 노련함 또한 곡을 무난히 소화하는데 한몫을 했다. 1악장에서 이청행의 연주는 관록은 무시 못한다는 속설을 증명이나 하듯 쉽고 편안하게 소화해 냈다. 3 악장에서의 실수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으며 이후의 연주는 자신감을 잃은 듯 다소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프로그램의 백미는 말러 교향곡 1번. 말러가 28세 되던 해인 1888년에 완성된 교향곡 1번 거인은 비관주의적인 성향과 죽음을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 악절들로 구분된 악장, 특이한 기악편곡, 팡파르의 사용과 새의 노래 모방, 민요적 색채가 짙은 악절 그리고 표제적 구성은 말러 특유의 여러 양상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휘자 박탕 조르다니아는 곡 자체를 하나하나 해부하여 각 부분을 잘 드러내 명확하게 하였고 또 그 부분들을 조합하여 완벽한 하나를 만들어 냈다. 40대에 접어들어 말러를 사랑하지 않으면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 할 정도로 매력적인 말러의 음악을 완벽한 색채와 팽팽한 긴장감(관, 현, 타악기를 담당한 전 파트의 완벽한 호흡 속에)으로 소화해낸 연주는 청중으로 하여금 귀가 번쩍 뜨이게 하는(막힌 속을 확 트이게 하는) 훌륭한 것이었다.

       

      이날의 연주는 여러 면에서 나에게는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였다. 동생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다가왔던 시절 레코드로 듣던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동생이 직접 연주하였고, 마지막으로 들려준 말러의 '거인'은 쉴새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40대 중반의 나를 부추겨 '거인'의 모습으로 다시 뛰고 달리라는 격려와도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날 나는 프로그램 전체를 소화하며(들으며) 많이 울었다. 지휘자 바로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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