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ermination·청년

대머리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4. 8. 20. 10:13

      나는 대머리다. 대머리라는 이유 때문에 황당한 일을 자주 당한다. 4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 받을 때가 특히 그렇다. 서서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앞에 앉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앉으시라 권한다. 괜찮다며 거절을 해도 막무가내다. 자기나 나나 비슷한 나이 인 것 같은데 이쯤 되면 앉을 수도, 안 앉을 수도 없고 곤란 그 자체다. 이런 일을 서너번 당하니 이제는 예삿일이 되었다.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나면 듬성듬성 나있는 몇올 안되는 머리카락조차 물기에 젖어 착달라 붙는다. '빛나리(아는 사람은 알리라 이 말의 의미를)'임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이가 한참 더 들어 보이는 사람도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속내(히히) 다 보이면서 꾸~벅 인사를 하니 공손히 답하지 않을 수 없다 . 그이 눈에는 내가 할아버지로 보이나?? 한번으로 끝이면 다행인데 만날 때 마다 고개를 숙인다. 공손히 답을 하니 더 신이 나는 모양이다. 아예 노인네처럼 행동 을 할까, 아니면 이실직고 나이를 밝힐까? 이미 수차례 인사를 받았는데 지금와서 '소생 약관 47세입니다'라고 떠들고 다닐 수도 없고, 이거야 원! 궁여지책 긑에 나온 묘수가 목욕탕에서는 '천천히 걷고, 말은 가급적 아끼자'이다. 두가지 대안 중 첫번째를 택한 셈이다.

 

김과장은 나이가 30대 후반인데 대머리가 심하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소프트웨어 개발납품 업체인데 정부기관에서 발주를 의뢰했다. 계약이 이루어진 뒤 개발과정에서 (구매처를 달리 부르는 말)은 '을'에게 불만이 많았다. '갑'이 보기에는 ’(김 과장이 근무하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이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개발일정도 못 마추고, 약속과는 다르게 고급 인력이 투입되는 것 같지도 않고... 이 일로 '갑'은 '을'에게 '사장이 되든 임원이 되든 책임 있는 사람이 와서 사과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라'고 다그쳤다.

 

회사의 담당자나 중간 관리자는 사장이나 임원이 사과하러 가야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은 못 된다고 판단했다. 자기들 선에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담당 K부장이 김과장에게 와서 간곡히 부탁을 했다. '김과장은 나이가 들어 보이니 같이 가서 스스로 이사라고 소개하고 사과를 해달라'며. 김과장 입장에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대머리여서 그렇지 아직 37세에 불과하고 직급은 과장인데...그런 거짓말을 해 본적도 없고. 입사이래 관리업무만 수행하여 외부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익숙하지도 않다. 대머리라는 이유 때문에 그토록 곤란한 자리에 가서 이사 행세를 하라니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만의 하나 탄로라도 난다면 어쩌란 말인가!

 

고민 끝에 김과장은 상사인 H팀장과 상의를 했다. 팀장 H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나는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아 갈 수 없으니 자네가 가서 하얀 거짓말 한번 하라"며 은근슬쩍 떠넘긴다. 실로 내키지 않는 일이나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면 하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K부장과 함께 문제의 정부기관을 방문하여 A사무관을 만났다. 관리부문의 대외이사로 일하는 H입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치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보다 직급이 높고 나이도 한참 많은 K부장을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어이, K부장,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고객께서 불편해 하시는데 이렇게 약속을 어겨도 되는 거야? 바로 들어가서 보고서 작성해 올리도록 해. 고개를 숙인 K부장 , 알겠습니다, 이사님.

 

 이사(사실은 대머리 김과장인데)라는 사람이 면전에서 그토록 K부장을 꾸중하고 면박을 주니 A사무관도 머쓱했다. 이사님, 그만큼 하십시오, 고의로야 그랬겠습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잘해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고 '갑'사의 문을 나서는 순간 김과장의 등어리엔 식은 땀이 쭉 흘렀다. 십년감수다.

 

 입사 초년병시절 사람을 만날 때면 너무 젊게 보이게 싫어 나이가 들어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머리카락이 빠지고 대머리가 되는게 여간 마음 쓰이지 않는다. 어디 머리털이 팍팍 올라오는 묘약이라도 없나?  말을 하진 않았지만 연기를 하는 김과장의 마음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어쩌면 두고두고 아플지도 모르지) 대머리가 된 것도 억울한데 거짓말까지 하라니…흑흑.

    <2004/8/20이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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