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성가신 제안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09. 1. 7. 22:06

성가신 제안

이택희

저녁 늦게 영화를 보러 가면 어떻겠느냐는 요청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에 영화를 보러 가기란 성가신 일임이다.  한국어 자막조차 나오지 않으니 대사를 놓쳐버리기 일쑤가 아니던가.

모처럼 얼굴을 대하는 딸 녀석 둘이서 함께 졸라 대니 마냥 거절할 수만도 없다. 새해 첫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처지이다. 특별히 둘째 아이는 그 영화만은 꼭 아빠와 함께 봐야 한다며 다른 친구의 제안조차 거절 했던 터였다.

처음 가보는 콜로세스 영화관으로 차를 몰았다. 하이웨이 세븐과 웨스턴 쪽 어디에 위치해 있다는 걸 짐작하긴 했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길바닥이 얼어 운전하기에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조금 헤매긴 했으나 별 어려움 없이 영화관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뺨을 때린다.

'이 추운 날 꼭 영화를 봐야하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와인까지 한잔 곁들였으니 영화의 대사가 자장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극장 안에 들어서자 제법 사람이 많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함께 않지 못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자리에 앉았다.

보게 될 영화는 짐 케리 주연의  예스맨. 늘 노(no)라고 말하던 한 사나이가 예스(yes)라고 말하는 습관을 가진 후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그린 코믹 영화다. 은행에서 대출관련 업무를 맞고 있는 주인공은 늘 노(no)라고 말하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노(no)라고 말하니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특별히 잘 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한 특별한 세미나에 참여하여 예스(yes)라고 말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면서 삶이 바뀌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딸아이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는 아빠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캐나다의 주류 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는 아빠에게 힘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야 나름대로 이루었다고 자부하였고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기여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캐나다로 와 일 년가량을 지나며 도전적이고 적극적이었다기보다는 소극적이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 영화를 보면서 아빠의 본성을 회복하라는 격려의 마음도  있었으리라. 다 자란 아이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응원하고 격려해주니 든든하기도 하지만 쑥스럽기도 하다.

어릴 때 아버님은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영화를 보여주셨다. 영화보자는 말에 며칠간 잠을 못 이루며 가슴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도시 근교에 살던 때라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와 영화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단장의 검이라는 중국영화를 보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누가 내게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를 말해 보라면 나는 늘 단장의 검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아버지와 함께 본 영화라 감동이 더하지 않았을까.

자식에게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하신 아버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당시 아버님의 연세가 삼십대 후반이나 되셨을까?  영화를 본 후 중국집에서 먹은 자장면 맛도 잊을 수가 없다.

후배가 새해 인사차 전화를 해왔다. 첫날을 어떻게 보냈느냐고 묻는다. 저녁에 식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고 하니 무척 부러워하는 눈치이다.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가족끼리 서로 시간을 맞추어 영화 한편 같이 본다는 것조차 쉽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반갑지 않은 요청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성가신 제안을 한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새해 첫날 첫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낸 기쁨이 있었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한해를 살라는 교훈까지 덤으로 얻었다. 주말엔 자장면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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