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혹 쉬운 일이 있다고 하면 하찮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크고 가치 있는 일일수록 진액을 요구하게 마련일 터. 피 같은 땀방울과 절절한 눈물이 진주와 같은 빛나는 보석을 만드는 것일 게다. 생명을 걸만한 가치를 지니는 일은 언제나 진한 눈물을 담보하기 마련일 테니까.
큰 아이가 식탁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서른에 가까워지는 나이에 아직도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전날 저녁엔 세 살 아래 여동생에게 자신보다 먼저 결혼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말해 주었단다. 빈말이라도 언니가 먼저 결혼해야 한다고,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더라면 좋았으련만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모양이다. 동생이 먼저 결혼해도 좋다고 이야기를 해놓고 막상 그런 상황이 펼쳐질 걸 예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었나 보다.
동생은 이미 직장을 잡아 나름 삶을 즐기며 룰루랄라 다니는 데 언니인 자신은 온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책과 씨름을 해야 하니 답답하기도 했을 터이다. 공부할 양은 많은데 그 공부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으니 더 막막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 번쯤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 역시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할 때였다. 친구들은 대학에 입학한 지 며칠도 안 되어 미팅에서 만난 파트너가 죽여준다며 자랑을 했고, 축제에 함께 할 파트너를 구한다며 설레발을 치고 다녔다.
당시 나는 시내 모 입시학원에서 지질하고 재미없는 참고서를 붙잡고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재수를 한다고는 하나 대학에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라일락 향기가 봄바람에 날려 천지를 진동할 때 나는 분필 가루 떨어지는 칠판 뒤에 앉아 말없이 속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때만이 아니다. 제대를 6개월쯤 앞둔 어느 날이었다. 미래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면 성인이 되어 스스로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해놓은 것이라고는 없으니 막연하였다. 까딱 잘 못하다가는 홀로서기를 못하여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음은 물론 앞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역할을 감당할 수도 없을 듯하였다. 당시 나는 너무도 답답하여 병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산리 기도원을 찾았다. 제대 후 사회에 나가면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두 번의 눈물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재수는 삶을 더욱 겸허한 자세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겸손한 자세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며 한걸음 한 걸음 성실히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다짐을 마음 판에 새길 수 있었다. 군 시절의 경험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노력에 노력을 더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인생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터이다. 젊은 시절 자신의 한계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훗날 삶을 더욱 겸허하게 대하게 된다. 주어진 삶에 전력을 기울이는 성실함을 지니게 마련이다.
조개는 자신의 몸에 들어온 모래나 이물질을 이겨내기 위해 진액을 분비해 이를 감싼다고 한다. 진액이 한 겹 두 겹 쌓여 단단해지면서 마침내 진주가 되는 것이다. 진주를 현미경으로 분석해보면 단백질과 탄산칼륨 층이 수백 겹 쌓여있단다. 아픔을 이겨낸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몸에 들어온 이물질과 싸움을 하지 않는 조개는 오래지 않아 죽고 만다.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이나 도전을 만났을 때 처절한 싸움을 벌여 이겨낼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는 오롯이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가끔 우리가 흘리는 뜨거운 눈물은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는 치료자이자 새로운 미래로 안내하는 안내자일는지 모른다. 조개가 품은 진주처럼 말이다.
덧붙임: 식탁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딸은 2022년 11월 현재 노인과 전문의 겸 뉴욕 주립대 버펄로 의대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Faculty Profile - Jacobs School of Medicine and Biomedical Sciences - University at Buffalo -
https://medicine.buffalo.edu/faculty/profile.html?ubit=jlee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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