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팔레치아 산맥을 넘으며
대학생 시절이었나 보다. 이른 새벽 휘경동에 위치한 삼육영어학원을 다녔다. 외국인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영어를 배우며 기회가 된다면 해외로 나가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지금처럼 유학이 흔한 때도 아니었다. 학비에다 생활비 등 그 큰 비용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십수 년이 지난 즈음이었다. 해외로 나가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새롭게 일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얼마 동안 혼자서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정 그렇다면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다. 다시 주저앉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부모님께 캐나다에 가서 살면서 공부도 할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다. 뜻밖에 부모님은 쉽게 승낙하셨다. 인사를 드릴 겸 당숙 어른을 찾아뵈었다. 당숙께서는 외국으로 나가 고생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호주로 이민을 한 젊은 부부가 안타깝게 자녀를 잃은 사례를 예로 들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대한민국도 살만한데 구태여 외국에 나가서 살려고 하느냐며 말리셨다.
캐나다에서 생활하던 중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한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공부를 하였다. 캐나다로 이주해온 지 일 년쯤 되는 시기라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가기가 뭐했다. 혼자서 뉴욕으로 갔다.
공부하던 중 주말이면 자동차로 뉴욕에서 토론토를 오가곤 했다. 롱아일랜드에서 토론토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2시간. 새벽에 출발하면 저녁 늦게야 토론토에 도착했다. 12시간의 운전 중 한두 번을 쉬고는 계속 내달렸다. 장거리 운전에도 피곤한 줄 몰랐다.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이 운전의 고통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에팔레치아 산맥을 거쳤다. 스크랜튼과 빙햄튼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를 이룬 산악지역을 만난다. 스위스의 산간마을과 강원도의 산간마을을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랄까. 풍광은 계절을 마다 다른 옷을 입고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큰 아이가 공부를 위해 뉴저지로 떠난다고 한다. 거처도 알아볼 겸 가족여행을 했다. 에팔레치아 산맥을 넘으며 이십여 년 전 자동차를 운전하며 다니던 시절을 생각해 냈다.
당시 어리기만 하던 딸이 장성하여 대학원 공부를 하고 다른 딸은 직장인이 되었다. 세월은 흘렀고 흰머리가 더 생겼다. 이제 내가 지나다니던 그 길을 딸아이가 다니게 되었다.
이 년 동안 딸은 그곳에서 공부하며 수련을 받을 것이다. 시간에 쫓겨 씻을 시간이 없을 때도 있을 터이고, 어려운 선배나 교수를 만나 예기치 않게 고달픈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을 터이다. 가족을 떠나 혼자 지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 않을까.
이런 어려움조차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삶의 과정 중 하나가 분명하다. 세상에 쉽게,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을 터. 무쇠가 되기 위해서는 풀무에 들어가 달구어지고 차가운 물에 들어가 식기를 반복해야 하지 않던가. 제대로 된 연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장장이의 손에 잡혀 망치로 수없이 다듬어져야 한다.
수련의 과정 중 딸은 자주 에팔레치아 산맥을 넘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산악지대의 풍광을 바라보며 창조의 경이로움에 잠길 터이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자긍심에 가슴 뿌듯함도 느끼게 되리라.
떠날 준비를 하며 짐을 싸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젊은 날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님 마음이 이러하셨을까?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면 새로운 도전은 늘 어려움을 동반하지만, 결국엔 기대 이상의 결과로 보답한다는 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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