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4. 11. 28. 08:57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글귀가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 집을 방문하거나 분식점이나 빵집 같은 곳을 가면 쉽게 발견하곤 하던 글귀였다. 아직도 이런 글이 놓여있구나!

지인은 한국에서 알아주는 직장에서 부장으로 일하며 한참 잘나가던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캐나다로 왔다. 아내 역시 학교 선생님으로 존경받으며 일하고 있을 때였다. 주위에서는 극구 말려댔다. 두 내외가 남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며 아쉬울 것이 없는데 구태여 외국을 나가야 하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이들 가족은 낯선 이국땅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고했다

캐나다에 도착한 지인은 잠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었으나 수년 전부터는 컨비니언스 가게(convenience store)를 운영하고 있다. 내외가 주말도 없이 일에 매달려 사는 일상이다. 그래도 한때는 한국에서 잘 나가던 부부였는데…. 낯선 나라에 와서 고생이 적지 않겠다 싶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장성한 큰 자녀는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기업 본사에서 일하고 있고 작은 자녀는 티쳐스 칼리지(teachers college)를 다니고 있다. 머지않아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터. 이들 가족은 한 지역에서 십수 년을 살고 있는데 집의 모기지(mortgage)도 다 갚은 상태다. 이런 상황이니 그동안의 삶이 의미가 없었다거나 보람이 없었다고만은 할 수 없으리라.

냉장고 옆에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선을 베풀며 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들 가족이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글귀였다.

사실 이 집을 방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얼마 전 암으로 아내를 천국으로 떠나 보냈다. 졸지에 엄마를 잃은 외아들을 부랴부랴 오타와로 유학보낸 후 짬을 내어 아들을 보러 왔다. 친구와 지인은 한 직장에서 근무했었고 그 연유로 지인의 집에 이틀을 머물렀다. 이런 가운데 토론토의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지인의 아내는 친구의 아들을 마치 친아들처럼 챙겨주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하여 친엄마처럼 보살펴 주고자 하는 배려로 여겨졌다. 정갈하게 식탁을 준비하여 아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따뜻한 사랑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런 모습을 대하며 지인 내외가 얼마나 사람들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외는 이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며 내게 물어왔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잠시 보류하기로 하였다. 스스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를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이 물음을 떠올리며 어렴풋이 생각한 답은 바로 그 시구(詩句)였다.

고통 없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지인의 경우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성실하게 살았기에 가치있는 집을 지닐 수 있었을 터요, 사랑을 베풀며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자녀들 또한 바른 길을 갈 수 있었으리라.

친구의 아들을 생각해본다. 어려서 엄마를 떠나 보낸 마음의 상처를 어이 보듬어 안을까. 아니 지금 당장 오죽 엄마가 그리울까.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엄마 생각이 날까. 이국땅에서 영어를 배우며 학업을 계속할 때 겪어야 할 좌절은 또 어이하리. 아들을 먼 나라에 보내 놓고 노심초사할 아빠의 마음은 차지하고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시킨의 노래처럼 마음을 미래에 두고 산다면 정말 어려운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그 또한 그리움이 될까? 아래의 글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전문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움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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