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희망의 씨앗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5. 1. 2. 04:46

되돌아보면 어지러웠던 한 해였습니다. 밝은 일보다 어두운 일이,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더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에볼라(Ebola) 공포가 세계를 뒤덮었고 지구촌 곳곳에서 테러와 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세월호 참사로 눈망울 초롱초롱하던 우리의 자녀들이 영문도 모른 체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수장(水葬)되었습니다. 경주에서는 리조트 체육관이 붕괴되어 열 명의 젊은이가 참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수습해 가는 과정에 적지 않은 사회적 갈등을 겪기도 하였지요. '과연 지구촌에 희망은 있는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한 해였습니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멀리 보이는 희미한 빛 하나가 소망이요 생명줄이듯 그런 가운데서도 희망의 씨앗은 있었습니다. 에볼라가 창궐하는 지역에 들어가 환자를 구하려 애쓰는 의사들을 볼 때에 그랬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순간 침몰하는 배 안에서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발버둥 치던 22세의 젊은 여승무원 박지영 양의 숭고한 희생에서도 또렷한 빛줄기 하나 보았습니다. “누나는 왜 구명조끼 안 입어?”라는 학생들의 질문에 누나는 너희가 다 탈출하고 나갈 거야.”라고 했던 대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돕기를 원하는 손길들이 그분들만은 아닙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에볼라가 극성을 부리는 지역에 들어가 치료의 손길을 펼치는 의사와 간호사는 더 많습니다. 박지영 양 외에도 세월호 참사의 영웅은 더 있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각오로 지구촌 곳곳에서 봉사의 손길, 선교의 손길을 펼치는 젊은이들과 선교사님도 계십니다.

갑오(甲午)년 마지막 날, 마침 수요일 아침입니다. 몇 주 전부터 수요일이면 아가페 센터에 모여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웃 오브 더 콜드(Out-of-the-Cold)에 다녀가신 손님들의 잠자리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사용하신 모포를 봉지에 넣어 세탁을 위해 정해진 자리로 옮겨놓습니다. 매트리스는 깨끗이 닦아 창고 한 곳에 가지런히 쌓아둡니다. 식사하신 테이블과 의자를 닦고 정리하여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둡니다.

화장실에서는 크레졸로 변기를 소독한 뒤 세면기 손잡이를 윤이 나도록 닦고 또 닦습니다. 바닥을 쓸어낸 후 물청소를 하고 휴지통을 비웁니다. 부엌에서는 손님들이 사용한 접시와 커피잔,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한 기구를 일일이 닦고 말리어 한쪽에 쌓아둡니다. 걸레로 바닥을 반질반질 닦아내는 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런 일을 위하여 적지 않은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한 해가 가는 마지막 날 이 수고에 동참하고자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들더니 축구팀 두 팀을 만들어도 될만한 인원이 모였습니다.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반드시 나와야 하는 일도 아닌데 자원해서 오셨습니다. 일 년 중 하루 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분들입니다. 출근하느라 아침잠이 그리웠을 분들입니다. 가게 문을 닫는 날이라고는 한 해 통틀어 손으로 꼽을 만한 분들이 쉬는 날이라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타나셨습니다.

소독 걸레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시는 한 분 한 분의 모습에서 에볼라 현장에서 치료에 열중하는 젊은 의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나는 너희들 다 구하고 나갈 게라고 말하는 또 다른 박지영 양을 보았습니다.

어릴 적 콩나물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할머니는 콩나물시루에 콩을 넣고 Y자 모양의 제법 큰 나무를 받쳐 수시로 물을 주셨습니다. 물을 준 후에는 검은 천 같은 것으로 덮어 아랫목에 두셨지요. 하루에 서너 차례 물을 주면 쑥쑥 자라곤 했습니다. 잘 자란 콩나물을 한 움큼 뽑아 바가지에 담고 부엌으로 나가시어 손주에게 먹일 콩나물 무침을 만드셨습니다. 콩이 콩나물이 되기까지 물을 주었던 것처럼 마음속에 늘 진리의 말씀과 명상을 심었기에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놓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도움의 손길을 뻗치기를 희망하는 마음들이 콩나물시루의 콩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이 있기에 을미(乙未)년 한해도 밝고 희망찰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분들의 따뜻한 미소가, 크고 작은 도움의 손길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살맛 나게 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과연 이 지구촌에 희망은 있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 희망의 씨앗이 자꾸만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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