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사랑은 대를 이어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4. 1. 13. 06:16

이번 크리스마스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큰 아이가 크리스마스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지내겠다는 계획을 말해주었다. 어울려 사는 세상이기에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난다는 계획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관계와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던가.

대신 아빠 엄마가 며칠간 다녀갈 수는 없겠느냐고 물었다. 새해 첫날 가족 모두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주었으면 했다. 네 식구가 뉴저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으리라 하였다.

큰 아이의 말대로 뉴저지로 가기로 했다. 둘째가 12 31일 밤 근무라 1 1일 아침이 되어서야 일을 마친다. 끝나는 시간 병원 앞에서 둘째를 태워 출발하기로 했다. 일기예보에 잔뜩 신경이 쓰인다.

청년 시절 군 복무를 할 때가 떠오른다. 79년 당시 훈련소에 입소하여 고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후 대구의 2군 사령부 수송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혹독한 추위와 싸워가며 운전교육을 마치고 금촌에 위치한 기갑부대에 배치되었다.

자대에 배치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께서 면회를 오셨다. 매점 옆에 위치한 면회실에서 정성껏 준비해 온 음식을 게걸스레 먹었다. 닭다리를 북북 뜯어가며 먹었던 그 맛과 소리가 기억 속에 쟁쟁하다.

지리도 익숙하지 않으셨을 터인데 어떻게 먼 길을 찾아오셨을까. 기차나 고속버스로 서울로 올라와 시외버스를 타고 오셨으리라. 지금에야 자동차와 내비게이터를 이용하여 어디라도 갈 수 있지만, 당시엔 자동차도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아버님은 6.25 동란 시 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하여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으셨다. 할머님께서 제주도까지 면회를 오셨더라고 하셨다. 배편도, 차편도 많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멀리까지 면회를 오셨을까 궁금해하셨다.

그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어머님의 가없는 사랑에 감격하여 목이 메이곤 하셨다. 할머님의 그 사랑이 아버님의 삶을 지탱해준 버팀목은 아니었을까. 아버님께서는 아들인 내게 면회를 오시면서 할머니를 생각하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딸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군 시절 면회를 오셨던 아버님 생각이 난다. 기회있을 때마다 먼 곳까지 자신을 찾아오신 할머님의 사랑을 말씀하셨던 아버지. 때때로 시골에 내려가면 설레는 마음에 잠 못 이루시던 아버지. 살면서 가장 기뻤을 때가 언제였느냐는 물음에 아들이 펴낸 책을 품에 안았을 때라며 미소 지으시던 아버지.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사랑은 이렇듯 대를 이어 내려가는 것일까. 수십 수백 년 전 우리네 부모님들께서도 그리하셨을 터이다. 자녀를 보기 위해서라면 천 리 길도 마다치 아니하고 떠나셨을 것이다. 짚신을 봇짐에 매달아 갈아 신으며 걷고 또 걷지 않으셨을까. 

눈보라가 치고 폭설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끊이질 않는다. 도로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위험을 무릎 쓰고라도 떠나야 하리라.

나이아가라를 지나 버펄로, 로체스터, 시러큐스, 빙햄턴, 스크랜턴, 포코노를 거쳐 뉴저지로 들어갔다. 집에서 출발하여 뉴저지까지 걸린 시간은 아홉 시간 삼십 분. 눈이라도 올까 봐 쉬지 않고 내달린 결과이다.  

돌아오는 길, 전날 내린 폭설로 곳곳에 눈이 쌓여있다. 다소간 위험을 느끼긴 했지만 전날처럼 눈보라가 치지 않으니 다행한 일이다. 포코노 산악지대를 거쳐 시라큐스에 닿을 때까지 오백 킬로미터의 길은 장관이다.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룬 흰 구름은 운치를 더하고 눈빛에 반사된 햇살이 싱그럽다. 높고 낮은 언덕에 쉼없이 펼쳐지는 백색의 향연! 옆자리에 앉은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맨해튼의 높은 빌딩보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더 인상적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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