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시

때가 차면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6. 1. 7. 16:59

때가 차면

이택희

땅이 온통 꽁꽁 얼어붙었다. 나뭇가지는 잎사귀 하나 남기지 않은 앙상한 모습으로 바람에 제 몸을 내어 맡기고 있다. 옷깃을 여민 채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찬 기운이 훅하고 온몸으로 파고든다. 싸하다. 사실은 집에서부터 추울 줄 알고 단단히 차려입었다. 겹겹이 껴입어 거동이 불편할 정도였다. 보기에 싫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보온이 잘된다는 모자도 뒤집어썼다. 그런데도 쌩쌩 불어 제치는 바람이 귀를 시리게 한다. 볼이 에인다.

여섯 명 장정의 손에 관이 옮겨지고 있다. 천천히 움직인다. 대지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꺼이꺼이 울음을 운다. 단풍나무로 만든 관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윤기가 난다. 관을 든 장정들 앞에 선 손주의 손에 영정사진이 들려있다. 살아계실 적 고운 모습이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 몸을 누일 때 얼마나 차가우실까. 내가 사랑했던 외할머니도 그렇게 가셨다.

할머니는 천도복숭아를 좋아하셨다. 익은 것들을 따낸 후 가지에 숨어있던 몇 개의 복숭아가 더 굵어지고 물이 차올라 처녀 볼처럼 탱탱해지면 더 맛이 있었다. 단물이 줄줄 흐르는 복숭아를 잡수시며 그렇게 좋아하셨다. 막내딸이 시집 가 고생 끝에 일군 밭에서 난 과실이니 어찌 맛이 없었으랴만 할머니는 복숭아가 맛있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하시었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뵙는 게 설날 세뱃돈 받는 것보다 더 좋았다.

잘 익은 천도복숭아의 속에는 씨가 들어있었다. 어떤 씨는 쩍 벌어져 있기도 하였다. 그 씨가 떨어져 땅에 심기면 묘목이 되고 묘목이 자라면 큰 나무가 되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삼라만상이건만 머잖아 봄이 오면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가지들이 간지럼을 못 견디겠다는 듯 몸부림치면 어린싹이 재잘거리며 가지를 비집고 나올 것이다. 수줍은 듯 수선화가 언 땅을 헤집고 올라와 해맑게 웃고 단풍나무 여린 싹은 살금살금 눈을 비비며 나오리라. 오므렸던 손을 활짝 펴 잎을 완성할 터이다. 샛노란 개나리가 싹을 피워올려 사방을 노랗게 물들이고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화답하리라. 아지랑이 아롱거리며 피어오르고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올 것이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지만, 겨울은 이미 봄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처럼 대지의 품에 안긴 주검 또한 부활의 씨를 품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익을 대로 익은 복숭아 씨앗이 땅에 심어져 새로운 생명을 피워 올리는 것처럼 얼어붙은 땅 저 아래 묻히는 주검 또한 때가 차면 부활의 기쁨을 노래할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사는 복을 누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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