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여기서 자녀란 내 자녀만으로 한정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을 포함한 지구촌에서 자라는 어린이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는 모든 청소년을 포함하는 말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다. 청소년 시절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인문학 서적을 탐독한 바있다. 최근들어 인문학 서적을 다시 손에 잡았고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연히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저자 이지성씨가 쓴 글을 읽게 되었는데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다시 읽고 싶은 욕심에 올려둔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스토리펀딩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4화 <하버드 교수들이 열광한 자녀교육법>’에서 따왔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십니까? 낙담하거나 한탄할 시간에 인문고전을 펼치십시오. 1,000년~2,000년 된 지혜의 산삼을 실컷 섭취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에서 아름다운 나눔의 문화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십시오.” <리딩의로 리딩하라> 중에서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나단 에드워드는 벤저민 플랭클린보다 더 위대한 영향을 미국에 끼였다고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프린스턴 대학교 학장을 지낸 새무얼 데이비스(Samuel Davis)는 조나단 에드워드를 가리켜서 ‘미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칭송했고 세계적인 신학자였던 벤저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는 ‘미국의 지식인 중 실제로 위대하다고 불릴 수 있을만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했지요.
저는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하버드 대학교 교수들이 열광한 카를 비테(Karl Witte)식 자녀교육법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인문학> 스토리펀딩 때도 자세히 이야기했었지요, 하지만 카를 비테식 자녀교육법에 대해서 처음 듣는 독자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카를 비테식 자녀교육법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서 목회하던 카를 비테라는 목사가 장차 태어날 아이를 교육하기 위해 플라톤, 에라스무스, 존 로크, 루소, 페스탈로치 같은 위인들이 집필한 교육 서적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로마의 교육에 대한 문헌들을 연구하다가 이 자료들이 하나같이 당시 독일 공립학교 교육과 전혀 다른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꺠닫고는 자신의 자녀를 그 ‘다른 교육’대로 키우기로 결심하면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카를 비테는 새로운 자녀교육법을 창안한 게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던 교육법을 재발견해서 자신의 아이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카를 비테는 이 교육법을 지능이 모자라다고 판명된 자신의 아이에게 적용, 고작 열여섯 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따게 만들었고 이어 베를린 대학교 법대 교수로 임용되게 했습니다.
카를 비테는 자신의 자녀교육법을 책으로 정리해서 세상에 내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책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치 누가 의도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우연히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되면서 책을 접한 하버드 대학교 교수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렸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레오 위너(Leo Wiener) 교수였습니다. 그는 카를 비테의 책을 읽고 엄청난 감명을 받은 나머지 기자회견을 열어서 이렇게 발표했을 정도입니다.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모두 천재로 만들겠다.’ 기자들이 도데체 그토록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고 묻자 레오 위너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카를 비테식 자녀교육법으로 아이들을 잘 교육하면 누구나 아이를 천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카를 비테식 교육법으로 키웠는데 아들은 열네 살에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갔고 두 딸은 각각 열네 살, 열두 살에 래드클리프 여대에 입학했습니다. 특히 아들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는 열여덟 살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딴 뒤 하버드 대학과 MIT 대학의 교수로 일하다가 인공두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면서 진정한 천재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은 카를 비테가 재발견한 ‘다른 교육’을 대대로 실천해오던 집안이었습니다. 이는 조다단 에드워드가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로부터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은 덕분에 이미 유년 시절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자유자래로 구사할 수 있었고, 그리스 로마 고전 원전을 모국어로 쓰인 책처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두뇌는 천재적으로 성장했고,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예일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4년 뒤 그는 수석으로 대학교를 졸업했고, 다시 5년 뒤인 스물한 살에 예일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전신인 뉴저지 대학교의 총장도 되었지요. 조나단 에드워드의 전기를 처음으로 집필한 새뮤얼 홉킨스(Samuel Hopkins)는 <조나단 에드워드 평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대학교 2학년이던 열세 살 때, 인간 이해에 관한 로크의 글을 읽고 큰 기쁨과 유익을 얻었다. 그는 비상한 천재성으로, 다른 말로 하면 타고난 능력으로, 그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깊이 꿰뚫더니 지금은 그것을 연습하고 완전히 깨닫기 시작했다. 종종 그리고 숨을 거두기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 책을 손에 들고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대학 시절에 읽었던 그 책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얻었으며, 그 책에 몰두하여 연구하면서 얻은 만족과 기쁨은 새로 발견한 금은보화를 손에 가득 들고 있는 욕심 많은 구두쇠의 기쁨보다 휠씬 크다고 말하고 했다.”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을 5대에 걸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적, 지적 수준이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를 주제로 한 연구였는데 뉴욕시 교육위원회는 조나단 에드워드 가문의 비교 대상으로 마커스 슐츠의 가문을 선정했습니다. 마커스 슐츠는 조나단 에드워드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지역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같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고 같은 수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후손에게 영적으로 <성경>을 삶의 지표로 삼고 지적으로 인문고전 독서에 힘쓰는 전통을 물려줃었던 반면 마커스 슐츠는 <성경>에 무관심하고 인문고전 독서에 문외한인 전통을 물려주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성경>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당황했을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성경>은 인문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신학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고서는 인문학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인문학이란 결국 인간답게 사는 것인데, 인문학자들이 인류 역사상 누가 가장 인간답게 살았느냐를 조사해보니,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 처형의 길로 나아간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인간답게 살았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입니다. 자, 그럼 성경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시 본 주제로 돌아겠습니다.
뉴욕시 교육위원회는 두 가문의 후손을 5대에 걸쳐서 면밀하게 추적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은 896명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통령 한 명, 상원의원 네 명, 대학총장 12명, 대학교수 65명, 의사 60명, 목사 100명, 군인 75명, 저술가 85명, 법조인 130명, 공무원 80명이 나왔습니다.
마커스 슐츠의 후손은 1,062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전과자 96명, 알코올 중독자 58명, 창녀 65명, 빈민 286명, 평생 막노동으로 연명한 사람이 460명 나왔습니다. 참고로 미국 정부는 마커스 슐츠의 후손들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가 넘는 국고 보조금을 지출해야 했습니다.
이상은 <리등으로 리드하라>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 정리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카를 비테식 자녀교육법의 핵심인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효과가 레오 위너 교수나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뛰어난 사람들의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걸까요? 미국에서 빈민들과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 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만든 얼 쇼리스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희망의 인문학>에서 라파엘 피자로와 그 형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두 사람은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고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푸에르토리코계인지라 어릴 적부터 마약, 폭력, 총기 등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삶을 살았습니다. 라파엘 피자로의 형은 대부분 푸에르토리코계 십대 아이들이 걸어간 길을 갔습니다. 그는 마약과 폭력과 도박이 일상이된 삶을 살다가 결국 사람을 죽였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반면 라파엘 피자로는 모범적인 십대 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진학, 지역 사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도데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얼 쇼리스는 여기에 대한 유일한 답으로 인문고전 독서를 들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라자엘 피자로는 어린 시절부터 단테나 소포클레스 같은 고전을 즐겨 읽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그의 형은 그런 시간을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가문과 마커스 슐츠 가문, 라자엘 피자로와 그 형의 사례가 세상의 모든 가문과 모든 개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을 가볍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례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사례들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당신의 후손에게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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