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묵사발

멋진 인생과 더불어 2017. 3. 31. 14:06

 아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면 그래요?’, ‘그렇지?’, ‘그렇겠군요라고 대답하란다. 답을 구하거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니 들어만 달란다. 서둘러 결론을 내거나, 해결방안을 알려주려고 하지 말고 그래요?’, ‘그렇지?’, ‘그렇겠군요라고만 반응하란다.

 한참 대화를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는데 가르치려 든다고 핀잔을 주면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면 자동으로 해결책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될까를 생각하여 결론을 내려 한다니 답답할 노릇이다.

당신은 늘 결론부터 이야기하잖아요.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해야 해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실망스럽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한다.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데 결론을 말하거나 가르치려 들기 일쑤라니 어쩌면 좋을까.

 아내는 일주일에 세 차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스스로 일하는 걸 좋아하는 듯하다. 유창하지 못한 영어이지만 그런대로 소통하며 손님을 맞이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 즐겁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일이 아내의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을 주는 듯하다.

 며칠 전에는 아내가 일하는 가게에 청소년 서너 명이 동시에 들어와 무엇을 훔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한 친구는 이쪽에서 찾는 것이 없다며 물건 찾아달라고 하고 다른 친구는 저쪽에서 불러 대고 또 다른 친구는 물건을 슬쩍해가는 듯하였다고 했다.  

 일하던 중간에 도둑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짜고 들어온 듯…”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아내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듣고 있던 나는 그럴 땐 차례로 말하라고 하든지 아니면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고 한 사람씩 들어오라고 하지라고 했다.

 이 말끝에 아내는 그래요?’, ‘그렇군요.’라고만 대답하랬는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치려 든다며 핀잔을 주었다. 젊을 때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러니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듣고 있었지만, 무척 실망스러웠다.  

 불이 났다는데 그래요? 혹은 그렇군요.’라고 태평스럽게 반응하고 있다면 실성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묵사발/정호승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치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묵을 만들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묵사발이 없었다면 묵은 온유의 형태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 또한 순하고 연한 묵의

겸손의 미덕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묵이 될 수 있었다

굴참나무에 어리던 햇살과 새소리가 묵이 될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미셀러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렉시 톰슨  (0) 2017.04.05
삶과 꿈  (0) 2017.04.03
토론토의 봄  (0) 2017.03.31
신앙인 정홍헌 장로님  (0) 2017.03.17
하물며 자매랴  (0) 2017.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