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집 주변 공원을 두 바퀴 돌았다. 한 번은 시계 방향으로 다른 한 번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으니 보고 느끼는 게 사뭇 다르다. 같은 길이라도 어느 방향으로 걷는가에 따라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달라지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시계 방향으로 걸으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서는 보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노래한 나태주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집 주변을 걷다 보면 커다란 연못을 만난다. 물가 주변으로 갈대의 키가 제법 높다. 지난해 키를 키운 갈색 쭉정이들이 허허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 아래로 파릇파릇 새로운 갈대가 키를 키워간다. 묵은 갈대 키와 견주어 반쯤은 자란 듯 보인다. 묵은 갈대들이 어린 갈대들에 자리를 내어주고 자연스레 물러나는 모습이 세상의 이치를 말해주는 듯하다. 갈색 쭉정이들과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 생명 조화가 조물주의 섭리를 노래하고 있다.
몇 년 전 홀로 계시는 어머님께 주무시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시면 읽으시라고 책을 한 권 사드렸다. 침대 옆에 두고 자주 읽으시겠노라 말씀하셨다. 두어 해 지나 한국에 들어갔다. 어느 날 어머님께서는 선물로 드린 그 책을 내게 도로 내어주시면서 당신은 읽을 만큼 읽었으니 아들이 가져가서 읽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토론토로 돌아올 때 짐 가방에 넣어 왔다. 벽난로 옆쪽에 다른 책들과 함께 쌓아두고는 가끔 읽곤 했다.
오늘 아침 산책에서 돌아와 우연히 그 책에 눈길이 갔고 서너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가위로 오린 작은 종이가 나왔다. 이면지였는데 무슨 낙서 같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 책을 여러 번 만지작거렸으나 한 번도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무엇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님 글씨였다.
큰아들을 위한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가 적혀있었다. 아들을 향한 마음의 소원을 기도문 속에 담으셨을 터이다. 책 속에 적힌 다른 기도문들을 읽으시면서 당신이 쓰신 기도를 수시로 읽으며 기도하지 않으셨을까. 기도문을 대하니 어머님을 직접 대한 것처럼 반가웠다. 나는 이 기도문을 발견한 것이 무슨 보물단지를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아버님을 천국으로 먼저 떠나보내시고 홀로 지내시면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눈앞이 뿌예졌다.
하마터면 지나쳐 보지 못하고 지나갈 뻔하였던 어머님의 기도를 오늘 아침 책 속에서 발견하였다. 앞으로 나는 이 기도를 나의 기도로 드리게 될 것이다. 어머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세상 끝날까지 노력하며 함께 기도할 것이다.
큰아이에게서 소식이 왔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며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또 다른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미국의학협회(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JAMA) 잡지의 표지에 실렸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기도 바쁠 터인데 시간을 내어 선배와 동료들에게 사실과 정보를 나누려 애쓰는 딸아이가 대견스럽다.
2020년 6월 6일 프리 라이팅
https://m.ibric.org/miniboard/read.php?Board=HBS_TREATISE&id=63228&idauthorid=32259&ttype
https://m.ibric.org/miniboard/read.php?Board=tr_interview&id=209887&qintervie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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