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이메일로 도착한 ‘삶의 지표가 된 칭찬 한마디’라는 제목의 ‘따뜻한 편지 1945호’를 함께 나눕니다. 박목월 선생님의 큰아들 박동규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시인 박목월의 아들 박동규 교수는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정신적 멘토가 바로,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박목월 시인은 먼저 남쪽으로 떠났고 그는 다섯 살짜리 여동생, 젖먹이 남동생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남았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피난길에 오른 뒤 평택의 어느 작은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됐지만 흉흉한 민심에 며칠 후 그의 가족은 쫓겨나다시 서울로 가야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그의 어머니는 아끼던 재봉틀을 쌀로 바꿔온 후 끈을 매어서 그의 어깨에 지웠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한참을 가고 있을 때 젊은 청년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너무 무겁지? 같이 가는 길까지 내가 좀 져 줄게." 순진했던 그는 고맙다며 쌀자루를 맡겼지만 장성한 청년의 발걸음은 어린아이가 따라가기엔 너무 빨랐습니다.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뒤에 있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조해진 그는 청년에게 이제 그만 쌀자루를 달라고 했지만, 청년은 이를 무시한 채 더 빠르게 걸었고 결국 갈림길에서 어머니를 놓칠 수 없던 그는 쌀자루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도착했고 어머니를 보자 눈물이 터진 그는 울며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가족의 생명과 같은 쌀자루를 잃어버린 아들을 가만히 껴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어미를 잃지 않았구나." 자신조차 스스로 바보 같다 생각됐지만 똑똑한 아이라며 보듬어 준 어머니의 한 마디에 앞으로는 똑똑한 사람이 되겠노라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훗날 그는 서울대에 입학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박동규 교수님의 어머님 유익순 여사를 만난 건 군시절(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군에서 여호수와 중창단이라는 이름의 중창단을 만들어 함께 활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함께 했던 중창팀 멤버는 저를 포함하여 윤병현, 임승종, 이국재, 서태하 등이었지요. 언젠가 찬양을 하기 위해 서울로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동원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교회에서 찬양을 하였고 박목월 선생님께서 출석하셨던 원효로 효동교회에서도 찬양을 했었지요. 효동교회에서 찬양을 마친 후 원효로의 한 한적한 다방에서 박동규 교수님의 어머님 유익순 여사를 만났습니다. 온화한 얼굴로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이런저런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지요. 부군 박목월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사모님께서도 무척 힘드셨을 터인데 일부러 시간을 내시어 저희를 만나주셨습니다. 힘내라고 격려해 주시며 용기를 주셨던 유익순 사모님 모습이 떠올려지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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