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석할 교회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 후 송파구 방이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아내와 나는 집에서 10분 거리인 수동교회에 등록했다. 이후 캐나다에 이주하기 전까지 10여 년 수동교회에서 기쁘게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수동교회의 담임목사는 정완모 목사님이셨는데 두 딸들이 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1995년 2월부터 토론토와 뉴욕에서 도합 3년여 머무르다 1997년 말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10년간 기러기 아빠로 살다가 2007년 4월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토론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캐나다로 돌아온 후 출석할 교회를 찾았다. 몇 가지 기준을 가졌었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집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야 한다라는 점과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들려오는가라는 점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현재 출석하고 있는 본 한인교회를 만나게 되었다.
2009년 1월 첫 주일 아내와 나는 본 한인교회 교인으로 정식 등록하게 된다. 20015년 장로로 피택 되었고(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2015년 9월 장로 안수를 받아 7년간 시무장로로 섬겼다. 그동안 환영 개발원(2년), 시니어 개발원(2년), 예배 개발원(3년)과 환경위원회(2021~2022년)를 섬겨왔다.
시무장로로 섬기던 기간 중 한석현 담임 목사의 은퇴와 고영민의 목사의 취임, 동성애자를 목회자로 안수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결혼의 정의를 수정하는 교단 총회의 결정, 펜데믹으로 인한 혼란 등 거대한 파도와 맡서야 했다. 정말이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성령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던 나날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 이 파고가 완전히 멈출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히 믿는 것은 교회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이끌어 주시리라는 점이다.
이제 금년 연말로 본 한인교회 시무 장로직을 내려놓게 된다. 시무장로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긴 것은 전적인 은혜였다. 환영 개발원을 담당하며 지체들과 함께 ‘아주 특별한 만남’을 준비하고 진행하던 일, 일 년에 서너 차례 '새 가족 환영회'를 하던 일, 매주일 새 가족들을 섬기던 일, 시니어 개발원을 담당하며 매주 어르신들의 식사자리를 준비하던 일, 봄(10~12주간)과 가을(6~8주간) '본 시니어 대학'을 열어 150여 참가자들을 위한 식사 준비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일, 성도가 별세하셨을 때 장례예배와 리셉션을 준비하던 일, 예배 개발원을 담당하며 팬데믹 중 어떻게든 예배가 지속 되도록 힘 쓰던 일, 교회가 문을 닫아야 했던 순간에도 매주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던 일, 지체들과 함께 예배당을 장식하던 일, 팬데믹으로 중단되었던 호산나 찬양대와 할렐루야 찬양대가 복귀하여 찬양을 다시 시작하던 때의 감격, 예빛 찬양팀의 한결같은 섬김, 신설된 조직인 '환경위원회' 멤버들과 플로깅을 하던 일 등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고 지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섬겼던 지체들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간다. 한 분 한 분이 성령님께서 예비해주신 동역자였고 나에게는 천사와 같은 분들이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신 귀하디 귀한 우리 지체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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