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텅 빈 공간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마치 백지 같은 공간. 김호연 작가가 쓴 소설 '불편한 편의점'에 나오는 독고처럼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어버린 깜깜함이 내게도 있다. 독고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의 경우 과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점이 다를 뿐이다.
그 백지 같이 텅 빈 공간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식사 시간이다. 일과를 마친 후 온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에 있었던 일을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정겹게 밥 먹는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 내게는 없다. 두 딸이 한창 자랄 무렵 십 년 동안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로 가족과 떨어져 지냈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젊은 부부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장면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보기라도 하면 부럽다 못해 아련하기까지 하다.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한 자신이 가엽고 아내와 두 딸에게 미안하다.
사춘기 나이의 한 학생이 저명한 학자이자 저술가인 50대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삶 가운데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이루자고 하는 목표가 있으신가요?”
교수는 학생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네 제게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있어요. 그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면 좋겠고, 함께 준비하는 논문들이 잘 쓰이고 발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또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운동하고 가족과 식사하며 웃고 즐기는 시간을 반드시 가지려고 해요.”
답변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아빠와 엄마, 자녀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 다른 사람들에는 지극히 평범할 그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제는 두 자녀가 자신들의 가정을 이루어 떠나가고 아내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능하면 식사는 꼭 아내와 함께 하려 한다. 삼식이라고 놀릴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함께 밥 먹는 시간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준비된 음식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최대한 천천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좋았던 일 아쉬웠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이라도 아내와 함께 밥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다행이다. 자녀와 수시로 만나 식사할 수 있음도 고마운 일이다. 기억 속에 텅 빈 공간이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며 빈 공간으로 남겨두지 않으니 감사한 일이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글 하나 올려놓는다.
<어느 병원장의 이야기>
유난히 바쁜 어느 날 아침에 나는 보통날 보다 일찍 출근을 했는데 80대의 노인이 엄지 손가락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환자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9시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면서 상처를 치료해 달라며 병원장인 나를 다그쳤습니다.
나는 환자를 의자에 앉으라고 했고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 전이라서 어르신을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고 이야기해 쥤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안절부절 초조해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나는 보다 못해 직접 환자를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내가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또 진료 예약이라도 있으신가 보죠?''라고 물었더니 노신사의 대답이,
''아닙니다 원장님! 그게 아니고 요양원에 있는 제 아내와 아침식사를 매일 같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내가 다시 노신사에게 물었습니다.
''부인의 건강 상태가 어떠신데요?''
''예,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제 아내가 알츠하이머(치매) 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나는 노신사에게 다시 묻기를,
''어르신께서 약속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많이 언짢아하시나 보죠?''라고 물었더니 노신사의 대답은 의외로 뜻 밖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원장님! 아내는 남편인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지 벌써 7년이 넘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요양원에 가셔서 아내와 아침 식사를 같이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노신사는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인 나를 몰라 보지만, 나는 아직 아내를 알아보거던요. 원장님!''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애써 참아야 했습니다.
나는 오늘 그 노신사를 통해 사랑의 참된 모습,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고 참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는 기쁨에 내 양 팔뚝을 비롯, 전신에서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육체적인 것도 아니지만 로맨틱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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