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박인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박 선생님의 목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호방한 그의 성격 또한 참 좋았다.
1977년 나는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하는 무대에 합창 단원으로 함께 선 적이 있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연주를 할 때 무대 뒤 서늘하고 퀴퀴하던 공기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돈호세 역은 테너 김진원 선생님이, 미카엘라 역은 박인수 선생님의 부인인 안희복 씨가 맡았다. 당신의 아내가 주역을 맡아서였는지 선생님의 얼굴을 가끔 뵐 수 있었다. 막 스무 살을 넘겼을 나이라 그랬는지 선생님이 멋있어 보였다. 이후 서울대 교수로 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가워 하기도 했다.
박인수 선생님뿐 아니라, 테너 홍춘선 선생님, 바리톤 이인영 선생님, 베이스 오현명 선생님도 돌아가셨다. 한때 성악 레슨을 받으며 공부한 적이 있는 나는 그분들이 부르는 가곡과 오페라 곡들을 좋아했다. 선생님들께서 서시는 무대라면 어디든 찾아가곤 했다. 세종문화회관이며 국립극장, 시민회관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특히 봄가을에 있었던 가곡의 밤 공연은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마치 요즈음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의 공연에 비싼 돈을 주고 티켓을 사서 가는 것처럼 말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명동의 한 길가에서 길거리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근의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길거리 공연이었다. 박인수 선생님과 제자들이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리허설 장면을 지켜보았다. 당시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는 장면을 보면서 내심 당혹스러워하기도 했다.
수년 전 수필가 홍억선 선생이 소리꾼 장사익의 리허설을 보고 느꼈던 소회를 쓴 글을 접하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이제 내가 사랑했던 성악가들도 한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이 또한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리라. 유가족 분들을 위로하며 여러 선생님들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
졸작 '홍억선의 리허설을 읽고'를 올려둔다.
친구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그는 근일점 문학동인회라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일 년에 두 차례 시화전이 열렸는데 친구가 쓴 시도 두어 편 전시되곤 했다.
시골에서 도회지 학교로 진학한 나는 당시 책에 깊이 빠져 있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투르게네프며 도스또엡스키, 안톤 체호프, 카뮈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에 빠져있을 때이니 문학동인회에서 활동하는 친구가 몹시 부러웠다. 학교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나 잡지에 친구의 글이 실렸을 때는 부러움이 극에 달했다. 친구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고등학교를 마친 친구는 국문과로 진학을 했다. 반면 나는 경상계통의 공부를 한 후 컴퓨터 회사에 입사했다. 정보통신 관련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쫓아가는 데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경쟁에 이기려 애쓰다 보니 어느새 오십 줄에 들어섰다.
어느 날 책 한 권이 우송되어 왔다. ‘수필시대’라는 잡지였는데 친구가 발행인으로 되어있었다. 좋은 글로 가득했다. 순간 학창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고 문득 나도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 생각도 잠시뿐 글을 쓰겠다는 소망은 삶의 분주함에 스쳐 지나갔다.
캐나다에 살면서 친구가 쓴 글 ‘리허설’을 접하였다. 소리꾼 장사익이 한 시골 장터에서 연주를 앞두고 리허설을 하는 장면을 보고 쓴 글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별생각 없이 ‘아, 역시 그는 노래를 잘하는구나’ 혹은 ‘공연을 앞두고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입을 맞추고 있구나’하고 지나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이 장면을 유심히 보았고 스스로 문하생을 가르치는 일에 적용하였다. 교훈을 얻을 뿐 아니라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나 역시 비슷한 장면을 목격하고 생소해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있던 어느 날 명동의 외환은행 본점 앞을 지날 때였다. 테너 박인수 씨가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개점을 기념하는 행사였거나 그즈음 열린 월드컵을 기념하는 길거리 연주였을 터이다. 젊은 연주자들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말하는 투로 보아 선생의 제자임이 분명했다.
빼어난 목소리로 선생이 먼저 노래를 하였고 젊은이가 이어받았다. 선생은 제자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몇 번이고 중지시키더니 다시 노래하게 하였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강하게 내야 하는 부분에서 소리를 제대로 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리허설이라고는 하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음에도 제자를 마구 나무랐다. 젊은이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내가 더 민망스러웠다. 제자라고는 하나 이미 성인이 되었고 중견 음악가로 활동하는 출중한 재목이었음에도 매몰차게 꾸짖었다. 연습은 잠시 쉬는 시간도 없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선생이 노래께나 한답시고 제자를 너무 심하게 면박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동안 흠모하고 존경했던 분이었는데 저 정도 인품밖에 안 되나 싶어 적이 실망도 되었다. 하지만 친구는 소리꾼 장사익이 예술인으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 정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때 얻은 교훈으로 제자들이 쓴 글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읽어 완벽하게 소화가 되었을 때 옆구리를 찔러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준다고 했다. 리허설 바라보며 교훈을 얻고 삶에 적용하는 자세가 그를 훌륭한 스승,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음이다.
이것은 친구와 내가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관조(觀照)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소재를 숙성시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의 차이이다. 98%의 완성은 누구나 할 수 있으되 나머지 2%를 완성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된다. 기실 그날 박인수 선생도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치려 했음이 분명하다.
아래의 글은 홍억선의 작품‘리허설’의 전문이다.
장사익이라는 소리꾼이 있다. 소리를 잘 한다고 널리 알려진 가수다. 언제였던가,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본 적이 있다. 어느 소도시의 축제행사로 기억되는데 그는 노래를 부르러 왔고, 나는 백일장을 주관하던 터였다. 백일장 행사라는 것이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많기에 어슬렁거리던 나의 걸음은 공연장에 이르게 되었고, 그는 마침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었다. 가수는 으레 쫓기듯 무대에 불려나와 숨을 고르기도 전에 한 두 곡 부르고는 잽싸게 사라지는 사람쯤으로 여겨왔던 나로서는 몇 시간 전부터 목을 푸는 그의 리허설이 생경하였다. 그가 목청을 뽑기 시작하였다. 국밥집에서 노인네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노래였는데 중간에 허벅지를 ‘타탁’하고 치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코러스를 넣어 흥을 돋우는 부분도 있었다. 노래는 중반을 지나 그가 목을 뒤로 꺾으면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50여 명이 족히 넘을 국악 반주자들도 저마다 활을 밀어냈다가 당기는가 하면, 양 볼이 불룩하도록 바람 소리를 만들고, 또 줄을 퉁기는 등 그야말로 무대가 출렁출렁거릴 때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그가 소리를 멈춘 것이다. 큰북이 두두둥 두두둥 소리를 몰아가다가 종내에 ‘타탕’하는 소리와 함께 일순간 정적이 오고 뒤이어 어느 연주자의 ‘허크’하는 추임새가 터져 나와야 하는데 박자가 어긋났던 모양이다. 노래는 그 대목을 넘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사실, 그 어긋남도 옆에서 듣기에는 영문을 모를 만큼 미세했건만 노래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로 그 대목에 집착하고 있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반주를 맡고 있는 연주자들도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모두가 그 분야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요. 그 어려운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자 아니었던가.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아침나절부터 닷새 장을 한 순배 돌고 왔는지 몇 잔의 약주로 이미 얼굴이 반쯤 익은 노인네들이거나 흘러내리는 치마를 주체 못해 수건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아낙네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예술을 위해 온 숨을 끌어올렸다가 토해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날 나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억누르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사실 나는 어줍게도 여러 해 동안 문학 강좌를 열고 창작지도라는 걸 해오던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소롭기 짝이 없는 노릇이요, 스스로 깨닫고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남의 앞에 서서 짧은 혀를 나불댔던 것일까. 문단 주변을 얼쩡거린 얕은 꾀를 밑천 삼아, 아니면 문학을 전공했다는 서푼어치의 깜냥으로 허황된 구변을 일삼지 않았는가. 내가 지금 까막눈이라도 면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아마 그 날의 심한 자책이 한몫을 보태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나는 글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건너온 글은 적어도 대여섯 번씩은 반드시 읽자고 하였고, 더러 문맥을 잡을 수 없는 비문 투성이의 글은 열 번도 더 읽자고 하였다. 손에 잡은 글이 외울 정도가 되고 문장 한 줄, 부호 하나의 의미가 글쓴이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글쓴이들의 옆구리를 찔러 귀뜸을 하였고, 그들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손뼉을 치며 나를 치켜세웠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이런 내막을 아는 이가 하루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나는 흠칫했고 당황했다. 문득, 노랫가락 한 대목을 부여잡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던 소리꾼의 리허설이 떠올랐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에고적인 과욕이요 만용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을 굳이 고집하는 것이 예술이요 소리라고 그는 확신하였던 것이 아닐까. 덩달아 나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을 그렇게 하는 것이 문학인가 여겨 여태 별놈의 짓을 흉내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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